2022. 5. 19. 13:5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사45:5-8)
운명론은 모든 사건을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세상사 내 능력 밖이라는 체념적 태도, 운명이란 것이 나를 가두는 힘이라 여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에 갇혀 살고 있다. 신자의 믿음이란 것도 내 능력 밖의 존재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의미에서 운명론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은 운명론과 다르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선하고 그 선함은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믿음이다. 친밀함과 인격적 신뢰로 '주의 강한 사랑의 손에 저를 맡깁니다'는 고백이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은 세상사에 대한 낙관적 사고와도 다르다. 그 낙관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 예수가 하신 말씀이다.
1. 믿음과 미신
믿음은 삶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능동적 기대이다. 미신과 다른 것이다. 미신은 나의 재물이나 재능으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 한다. 신을 변화시켜 내 운명을 바꾸고 내 목적을 성취시키려는 것이다. 반면 믿음은 신 앞에 내 삶의 바뀜이다.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나의 변화 유무에 있다. 그러니 교회를 출입한다 해도 하나님을 헌금이나 정성으로 달래어 자기 목적 성취 대상으로 여긴다면 미신적 행위이다. 신을 바꾸려 하는가, 나를 바꾸려 하는가가 미신과 신앙의 차이인 것이다. 믿음은 단지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문제이다. 성경은 개인적 관심에서 미래를 엿보려하거나 정체 모를 외부 힘에 기대어 소원을 성취하도록 돕는 사이비 종교를 경계하였다.
40년 광야생활 끝의 가나안 땅에 들 즈음,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미신을 엄중히 경고한 바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신18:9-14) 믿음의 초보적 기도는 내 문제해결에 집중했던 우리들이었다. 그러나 성숙해지면 인내와 능력을 주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고 싶다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한다. 예수처럼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바탕하여 경건을 구하는 기도와 그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도가 우리 소원을 대신는 것이면 그것은 미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위험에 처해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그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인생과 싸워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 거듭되는 실패에서도 하나님이 내 손을 꼭 잡고 계심에 감사할 수 있음이 믿음의 기도이다. 성경에는 이런 기도의 능력자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2. 믿음은 행동이라
디매오의 아들(바디매오)은 맹인이었고 거지였다. 예수가 제자들과 여리고에서 나가실 그 때 허다한 무리가 따르고 있었는데 길에 앉아 있던 바디매오가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에 소리 질러 그의 주목을 끌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볼 수 없었기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쪽으로 무작정 외쳤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조용하라고 면박을 주었다. 명예와 수치를 중히 여기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게다가 오염원으로 간주되는 맹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지르니 주변 사람들이 면박을 준 것이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물러설 수 없었다.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외침이 예수에게 닿았다. 예수가 멈추어 서서 그를 부르라 하니 겉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께 나아 온 바디매오, 그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나간 것이다.
예수는 먼저 물었다. "당신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그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바디매오는 주저하지 않았다. "보기를 원합니다." 단 한 마디, 그의 삶에서 그가 원했던 단 한 가지 소원, 그것은 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예수가 선포하였다 ”가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오.“ 그 순간 그가 보게 되었다. 이후 그 길로 그는 예수를 따랐다. 예수는 그의 신앙을 묻지 않았다. 요리문답같은 것도 없었다. 바디매오가 한 일은 크게 소리를 두 번 지른 것과 예수 앞으로 달려온 것 뿐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그의 행위를 보고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오."하였다. 그의 행위가 그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예수, 이 분이라면 자기 문제를 해결해줄 것임을 확신하여 부끄러움도 주변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앞으로 온 그 분에게 자기 삶을 던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12년간이나 혈루증 여인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하고 재산도 다 소비했으나 효력이 없었던 그녀, 오히려 건강은 더 나빠졌다. 어느 날 예수가 자기 동네를 지나간다는 소문에 과감히 행동하였다. 군중 가운데로 끼어들어와 뒤에서 몰래 그의 옷에 손을 댄 것이다.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고 확신이 있었다. 사실 이 행위는위험한 처신이었다. 당시 유대교 정결규례상, 이는 예수를 오염시키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불결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공공 장소에서 이런 행위는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 처신이었다. 여인도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손을 대었다. 손을 대는 순간 그 여인은 즉시로 자기 몸에서 출혈이 멈추고 나음을 느꼈다. 예수도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감을 느껴 물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는가?" 도망쳐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떨면서도 사실대로 말했다. 이에 예수가 여인에게 한 말은 질책이 아닌 축복이었다. "딸이여!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으니 안심하고 가시오.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시오."(막5:23)
3. 현실을 직시하는 힘으로
바디매오에게서와 똑같이 예수는 그 여인이 교리를 잘 아는지 묻지 않았다. 그 여인도 예수 옷에 손만 대어도 낳으리라 확신으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예수는 그녀의 그 행동을 믿음으로 보았다. 가혹한 당시의 가부장 사회에서 12년 동안이나 말 못할 병을 앓으며 '죄인'으로 낙인찍힌 운명, 여인은 그런 삶을 불가항력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을 가두는 그 힘에 저항해왔다. 그래서 움직였다. 얼굴을 묻고 군중 사이로 끼어들어 예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런 여인의 행동이 예수로부터 구원을 이끌어낸 것이다. 예수께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 깨뜨려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도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시오"(눅7:50)라고 축복하였다.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 예수 앞으로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도 예수는 "일어나 가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오"(눅17:19)라고 하였다. 위험 앞에서도 겁내지 않았던 사람들, 고통을 극복할 용기를 내었던 사람들, 운명과 맞서 싸워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해온 사람들, 우리도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미신의 출발점은 공포이고 수치심이다. 그 공포와 수치심은 창3:10의 아담 말에 이미 담겨 있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금도를 넘었던 첫 사람 아담과 그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죄로 인해 만들어진 두려움이 있다. 자신이 발가벗은 존재임을 알고 수치심에 하나님을 피해 어두운 곳으로 숨는 공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두려움과 수치심에서 누가, 어떻게 우리를 벗어나게 할 수 있을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4:18) 성경은 인간을 내면적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사랑이라고 증거한다. 그것도 온전한 사랑,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알기에 우리는 믿는다. 그런 우리의 믿음은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신다’는 확신이다. 누구도 이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도우사 모든 일이 잘 풀려감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상황에서 희망을 유지함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역병이 온 세상에 만연했을 때, 지도자 한 사람의 오기와 무지로 많은 사람의 삶이 위험해질 때, 그리고 우리 사회에 거짓과 편견과 혐오와 차별의 폭력이 횡횡할 때, 그런 것들 것조차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기계처럼 모든 것을 결정해 놓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획은 오히려 모든 상황에서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파괴될 수 없는 새 창조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봄이 왔었고 이제 여름으로 향하고 있다. 믿음은 문제 회피가 아니다. 믿으면 그분이 모든 걸 다 알아서 처리해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아니다. 믿음은 고통과 문제를 직시하는 힘이다. 두려움 없이 오늘을 살게 하는 용기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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