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2022. 5. 19. 02:4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과거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힘든 노동의 현장을 찾아가 일하고 거기서 받은 일당 전액을 불우 이웃에게 기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일당으로 받은 현금봉투를 뿔달린 말 인형을 타고 올라가 하트 모양의 모금함에 넣으면 기부 총액이 표시되는 훈훈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출연한 배우들은 그 체험을 마치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하루 동안의 고생이 끝나면 본래 자신의 안락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 간 그들에게 '삶의 현장'은 일시적 체험 프로그램에 불과했던 것이다.

 

1. 사랑하기에

'사랑의 서신'이라 불리는 요한일서의 골자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본성은 사랑이라는 것과 그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의 절정이 독생자 예수를 내어준 것이니 우리 인간은 예수를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 이를 실천하라는 것이고 그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줄이고 또 줄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끝없이 예언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함도 사랑하기 때문이며 독생자를 내어줌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단지 '체험 세상 삶의 현장' 프로그램을 찍으러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니라"(4:15).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배고픔을 알았고 화낼 줄 알았며 모든 종류의 유혹과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오셨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제노아 도시에는 무게가 8톤이나 되는 거대한 예수 동상이 있다. 높은 언덕이 아닌 도시 낮은 곳에 세워져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 앞 바다에서 큰 해전이 있었는데 많은 군함이 침몰하면서 젊은이들이 죽었다. 그 젊은이들의 부모들이 바다 깊은 곳에 수장된 자기 자녀들을 위해 그곳에 예수상을 봉헌했던 것이다. 높은 언덕 위에 선 예수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내려와 함께 울고 함께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 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하나님는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왔다. 그 깊은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마지막 여정이 죽음에 이르는 여행임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 도성에 들어가면 종교지도자들과 로마군대가 합작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 추종자들은 그의 예루살렘행을 주저하였고 말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꺼리지 않았다. 나귀를 타고 앞장서 나갔다. '호산나'를 외치며 자기들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던 군중들, 바로 그들이 빌라도 법정에서 자신을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라' 외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다. 죽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를 사랑하기에' 사지로 들어간 것이다.

 

2. 그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약해진다. 그래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부모가 힘이 없어 지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부모가 자식을 더 사랑하기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는 것이다. 소위 '사랑의 패러독스'이다. 이 역설을 잘 알았던 솔로몬의 재판은 지금도 명판결로 전해 온다.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자가 서로 자기 아기라고 다투니 솔로몬은 칼을 가져와 그 아기를 둘로 갈라 나눠주라고 했다. 가짜 엄마는 그렇게 하자고 했고 진짜 엄마는 아기를 내어주겠다고 했다(왕상3:16-28). 그때 누가 진짜 엄마고 누가 가짜 엄마인지 드러났다. 사랑하면 약해진다. 솔로몬은 그 '사랑의 역설'을 알았던 왕이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세상에 내어줌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예수, 도망칠 수도 있었고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으며 천군천사를 데리고 세상을 일시에 심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사랑이 너무도 깊기에 약해졌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도 대속물로 내어주었다. 이렇듯 사랑과 힘은 반비례함을 보여준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 사랑하면 권력을 놓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낮추었고 사랑하기에 약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약해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상대에게 더욱 민감해짐이었다. 그래서 그 사랑의 상태가 죽음으로까지 마다 않게 된 것이다.

 

살다보면 밀어붙이기보다는 물러서는 것이 더 숭고하고 더하기보다는 빼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가 많다. 힘을 빼는 것이 진정 강해지는 경우들이 너무도 많다. 모든 운동의 기본도 먼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에서 시작된다. 노래를 잘 하려면 우선 목소리에서 힘부터 빼야 한다. 남과 소통을 잘 하려면 대화할 때 힘을 빼야 한다. 소통의 고수는 위력으로 상대를 누르지 않고 겸손과 세심한 배려로 상대를 세워주며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렇게 힘을 빼는 것이다. 진짜 사랑은 강요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는다. 억지로 요구하지도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로 아끼기 때문에 자기 힘을 빼고 스스로를 낮춘다. 지는 것이다. 아니 져주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약해지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약함으로 강하게

전능자 하나님이 천군과 천사들을 거느리고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지 않고 초라한 나귀를 타고 들어왔다. 우리를 사랑한 하나님, 사랑하기 때문에 낮아졌고 힘을 빼어 그렇게 왔다. 마땅히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했음에, 당연히 우리가 채찍에 맞아야 했으나 하나님, 그가 그리하였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3:5) 십자가는 그렇게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 당신의 약함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어느 순교하신 목사님의 말처럼 기독교는 '인간의 약함' 위가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약함' 위에 세워진 종교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13:4) 여기 '약하심''사랑하심'으로 바꾸어 읽어보면, "그가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에 박혔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신비였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다 내어주고도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사랑, 그 신비로운 사랑으로 죽는 길인 줄 알면서도 예수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왔다.

 

'아마추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보통 '비전문가'를 뜻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원래는 '돈받고 직업적으로 하는 프로 선수 아닌 자'를 가리킨다. 이 용어의 어원은 라틴어 '아모르'인데 그 뜻은 '사랑하다'이다. '사랑하기에' 행동하는 자가 아마추어인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기에 행하는 자가 아마추어라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아마추어 사랑이라 말한 것과 같다. 자기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어려움을 마다 않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당신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누며 살라 한 것이다.

 

결론

우리를 사랑하였기에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갔던 예수, 그것은 각본대로 연출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삶의 현장 체험 프로그램을 찍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였기에 배반을 감수하였고 자기 손과 발에 못을 치는 무지한 자들을 용서하였다. 그렇듯 사랑이 깊었기에 약해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다. 사랑하면 강한 자는 약해지고 사랑하면 약한 자가 강해지는 하나님의 이 사랑의 신비, 그 은혜가 우리를 강하게 한다. 하나님의 약함이 우리의 강함이 되는 것,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