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

2022. 5. 19. 12:4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20:11-18)

 

안식일 다음날, 동 트기 전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무덤으로 향했다. 무덤에 와서 보니 무덤 문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져 있었다. 놀란 막달라 마리아는 한걸음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모르겠다‘(20:2)고 전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 무덤에 이르니 정말 무덤이 비어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요20:9) 하신 성경 말씀을 기억지 못한채 각자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1. 막달라 마리아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는 이야기들 중 하나이다. 그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예수 시체 뉘었던 곳 머리 편에, 또 다른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다. 그 천사들이 우는 여인에게 물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하지만 쏟아지는 눈물로 천사들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는 그들에게 하소연하였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누군가가 예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예수는 그녀의 뒤편에 서 있었고 마리아 또한 돌이켜 그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들을 그 예수만 바라보며 따랐던 그녀였는데 어떻게 그 예수를 몰라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녀의 슬픈 심경과 눈물 때문이었던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깊은 슬픔으로 큰 상실감을 경험해 온 우리들이다. 마리아 역시도 예수를 잃었고 그 시신조차 강탈당한 충격과 슬픔에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예수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가 무덤 관리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관리인이여! 혹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지러 가리이다. 혼자 힘으로 그 무거운 시신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무모함은 사랑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그만큼 깊었기에 지금 그녀는 떨며 울고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딸을 낳으면 흔히 짓는 이름이 마리아였다. 복음서에도 여러 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마리아, 요셉 어머니 글로바 마리아,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등.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었다가 예수에게서 치유를 받고 이후 열렬한 예수 추종자가 되었다. 자신의 인생을 올인하여 예수를 따라다녔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왔고 골고다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친 후에도 그녀는 예수 무덤을 찾아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그녀는 예수 부활을 처음으로 증언한 초대교회 지도자요 사도 중의 사도였다. 하지만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왜곡된 인물은 없었다.

 

2. 왜곡된 여인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전까지 성경은 너무도 귀하고 비싼 책이었다. 오직 사제들과 학자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성경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일반 사람들은 사제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 설교하면서 그녀가 '일곱 귀신' 들림은 일곱 가지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창녀로서 지은 성적 문란이었다고 해석하였다. 교황은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 갈릴리 나인성 근처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 마리아(7:37), 그리고 베다니 한센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 마리아(26:7)를 혼합하여 막달라 마리아를 가공하였다. 성경이 귀신들림을 음란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음에도 교황은 절대로 틀릴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 결과, 초대교회 위대한 지도자요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인 막달라 마리아는 졸지에 창녀로 전락하였다. 교황 설교 이후 1,400년 동안 마리아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카잔차키스의 원작을 바탕한 영화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이나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뿐만 아니라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 묘사되었다. 다행히 2018년에 개봉된 데이비스 감독의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첫 증인>은 달랐다. 작은 어촌 마을 막달라에 사는 마리아에게 가족은 정혼을 강요한다. 마리아가 거부하자 가족은 마리아에게 마귀가 씌었다고 판단하여 고문에 가까운 퇴마의식을 행한다. 그래도 마리아에게 변화가 없자 가족은 기적으로 유명한 랍비 예수를 청한다. 자신이 악령에 들린 것같다는 마리아의 말에 "넌 악령에 씌운 게 아니다. 마리아야"라고 말해주는 예수에게 감동한 마리아는 이후 평생 그를 따라 다닌다. 데이비스 감독의 영화처럼 막달라 마리아를 베드로와 동등한 사도로 해석함에 무려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2016년이 되어서야 교황청은 마리아를 '사도 중의 사도', 부활한 예수의 첫 증인으로 인정하였다.

 

깊은 슬픔에 빠져 부활 예수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에게 주님은 마리아야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어느 싯구가 떠오른다. 마리아는 예수가 왜 울고 있느냐고 물었을 때가 아니라 마리아라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 예수를 알아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주적 관계와 다르기를 원한다. 내 삶에 와서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내 살림 구석구석까지 살펴주기를 원한다. "여호와께서는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49:1) 바로 이런 하나님을 원한다. 그래서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가 부활한 이레, 오늘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3. 오늘 우리의 부활

교회는 선한 목자가 그들 각자의 이름 부름을 듣는 부활 공동체이다. 부활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다. 다시 산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부활은 인식의 대상도 아니다. 마리아처럼 체험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부활한 예수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빈 무덤은 사망 권세를 이긴 하나님의 승리라는 추상적 진실을 넘어섰다. 그 순간 예수의 빈 무덤은 부활 하나님의 현존을 만나는 영생의 자리가 되었다. 바울은 예수가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 믿음도 헛것이며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될 뿐이라 하였다(고전15:14-15). 그럼에도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은 관념적이고 건조한 교리적 고백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신앙 문제를 마지막 때의 부활만 알고 그렇게 믿는 듯하다.

 

베다니의 마르다가 고백한 교과서적 문답처럼 말이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가 찾아와 "네 오빠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하였을 때 마르다는 "물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나도 압니다"(11:24)고 대답했다. 그녀는 부활을 믿었지만 그것은 마지막 때의 사건으로만 알았다. 그러자 예수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를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고 되물었다. 부활 생명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주는 부활의 생명은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서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능력이요 체험인 것이다. 죽은 다음에야만 새롭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부활의 능력으로 새롭게 사는 삶이다.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자신있게 선포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빈 무덤 앞에서 주님의 현존을 체험한 막달라 마리아는 드디어 내가 주를 보았다고 고백하였다. 부활 신앙은 막달라 마리아의 이 고백에서 시작되었다. 이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기독교인은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예수에 대해서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사람들인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만난 사람들' 이란 말이다. 부활 예수는 이념이나 교리나 유령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지각을 뚫고 우리의 슬픔을 지나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온다.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 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4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