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15:4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19:3-9)
오늘날 노년층 이혼들이 많다고 한다. 자식들 때문에, 체면 때문에 평생을 참고 살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더는 참고 살 수는 없다는 할머니들의 반란이 과감하다. 최근에는 중년층의 졸혼까지 유행한다. 이혼이나 졸혼까지는 아니지만 더 많은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결혼생활을 ‘살아내고’ 있는 눈물겨운 현실이다. 연애할 때에는 하늘별도 따다 줄 것 같던 이들이 결혼만 하면 원수처럼 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가까운 관계가 부부관계인데도 왜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보다 더 많이 싸울까? 이는 결혼이 담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부부관계가 표면적인 것 외에 영적인 의미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리라.
1. 결혼과 가정
예수가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처음 이야기한 후 계속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에 오늘의 이 장면이 나온다. 여기 이혼 문제는 단지 사람들이 결혼했다 이혼함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짐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연관되었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한 부분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 율법의 이 부분으로 예수를 시험하였다. 그들은 이혼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여부보다 예수를 곤경에 빠트림에 더 관심을 두었다. 당시는 헤롯왕이 자기 본처를 버리고 동생 아내였던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 사실을 비판했던 세례자 요한의 목을 쳤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어떤 대답을 한들 그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었다.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면 헤롯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고 이혼을 해도 된다고 말하면 이스라엘의 랍비로서 이혼을 조장한다는 공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이 질문을 하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힐렐파와 샴마이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힐렐은 샴마이의 제자였지만 더 개방적이었다. 힐렐과 샴마이 두 학파를 축으로 집대성한 이가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이었다. 따라서 개방적인 힐렐학파는 이혼이 가능한 일을 여러가지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수치되는 일을 하여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줄 수 있는 경우를 몇 가지로 해석했다. 아내가 요리를 못하는 경우, 이웃집 여자보다 예쁘지 않은 경우, 남편 앞에서 시댁 욕을 하는 경우,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바가지를 긁어 수치를 주는 경우 등, 그런 경우에 여자들은 이혼을 당할 수 있었다. 힐렐학파는 그렇게 신명기 24장1절을 해석하여 두세 명의 증인만 있으면 언제 어느 자리서든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하였다.
반대로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이혼당할 수치스러운 일을 오직 간음죄라고만 해석하였다. 여자가 간음을 하다 들키면 남자가 이혼을 할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어떤 경우에라도 이혼을 용납하지 않았었다. 힐렐학파는 예수께 이 이혼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들이 허용하고 있는 이혼에 대한 자유에 확인 도장을 받고 싶었고 샴마이 학파는 우리는 이렇게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들 의를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반면, 예수는 그런 사악한 의도로 질문하는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설명하려 하였다. 성경은 이혼이 여호와께서 기업으로 주는 땅을 범죄케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땅 가나안, 그 땅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였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남여가 만났다 헤어짐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것이다.
2.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것이니 절대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것. 예수가 샴마이 학파의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아담)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6-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시고 자기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복수이면서 단수인 하나님, 분리될 수 없는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삼위 하나님의 그 본질을 그대로 불어넣어 만든 것이 자와 여자였다. 그러니 부부는 이 땅에서 둘이 만나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유기체인 그 나라를 보이기 위해 허락한 제도이다.
결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해 놓은 곳이 에베소서이다.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몸인 교회의 구주이십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같이, 아내들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이신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를 내주신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큽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엡5:22-32) 가정은 한 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그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배우며 완성해 나가는 공동체이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같이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고 아내는 주께서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한 것처럼 남편을 섬기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 그대로 될 때 이 땅에 천국 같은 가정이 탄생한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육신을 입고 있기에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언제나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가 피차 목숨을 바쳐 사랑을 하고 섬길 수가 없다. 다만 그 실패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국면으로 이끌어간다는 사실이 위로이다. 그렇게 실패할 때마다 우리 힘으로는 그 하나됨의 역사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은혜의 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정이다. 그렇게 가정을 점차 작은 하늘나라로 만들어 간다. 때문에 복음이 빠진 부부생활, 믿음이 없는 가정생활은 실패로 끝나기가 쉽다. 설령 겉으로 행복해 보인다 한들, 분명 상대편 누군가가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 정말 바람직하고 행복한 가정일까? 가정이라는 생활을 통해,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실감하여 예수가 우리의 하나 됨을 위해 죽었다는 십자가 현실을 알아가는 것이다.
3. 서로의 거룩을 도모하면서
인간들은 아담으로부터 죄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그 분과 동행했던 존재에서 그 분으로부터 쫓겨난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인간 실존은 하나님과 이혼을 당한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 힘으로 가정을 하나님 형상처럼 끈끈한 사랑으로 만들어 갈 수 없다. 이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됨이 결혼에서 배우는 것이다. 결혼과 가정은 절대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짐을 함께 나누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혼을 통해서 서로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물론, 결혼으로 자기 짐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려는 의도에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배우자가 자기 존재의 확장에 불과하기에 배우자의 외양이나 학식이나 재산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 필시 언젠가 배우자에게 실망한다. 상대방을 이용해 자기 확장을 하려하니 그 욕심이 끝없기 때문이요 언젠가는 자기 욕심을 채워주지 못하는 상대방을 못마땅히 여겨 결국 이혼이라는 방법으로 서로의 가슴을 찢는 것이다.
상대방이 뭔가 부족하고 나하고 맞지 않는 성격차이 때문? 아니다. 결혼은 예수와 교회의 관계라고 했으니 모든 상황이나 사건들을 영적으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필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동원하신다. 당신 백성들의 거룩을 훈련하시기 위해 서로의 배우자를 막대기로 들어서 쓰실 수 있는 것이다. 가정은 내가 만족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깨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시금석으로 삼아 그 돌맹이가 나를 긁으니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며 점차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 결혼이다.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 부부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이 땅에 그런 관계를 만들어 우리를 그 관계 속으로 밀어 넣을 때는 무언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혼자 살면 외로워서 둘이 붙어 재미나게 살라고 그런 관계를 허락함이 아니다. 결혼은 천국에 있는 유일 부부관계인 신랑 예수와 신부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 추구하는 훈련의 장인 것이다.
예수 당시의 남자들도 결혼을 자신들 필요를 채우고 자신들 짐을 대신 져 줄 사람 얻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도 “그렇게 우리 맘대로 하지 못할 것이면 차라리 혼자 사는데 낫습니다.” 하고 말할 정도였다. 일견 맞는 말이다. 정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기의 필요만을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 결혼이라면 혼자 사는 것이 낫다. 오죽하면 성경도 독신을 은사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거룩을 배울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만큼 결혼생활은 힘든 것이고 책임을 동반한 어려운 선택이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성이 남아 있고 타락한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죄성이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려고 하고 여자는 남편을 장악하려 하니 부부는 매일 싸울 수밖에 없다. 모든 동화의 끝이 공주와 왕자의 결혼으로 끝난다. 신데렐라. 백설 공주 모두 왕자와의 결혼으로 끝난다. 결혼 후의 그림까지 그려 놓으면 그 동화는 더 이상 동화가 아니라 참혹한 현실이기에 모든 동화는 결혼식 장면을 끝는다.
결론
결혼은 동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예수가 필요하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원한다면 예수를 배우고 복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배경을 보지 말고 신앙을 보아야 한다. 결혼은 상대방을 이용해 내 짐을 그의 어깨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복음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어야 하는 사건이 결혼이고 가정이다. 이미 예수와 연합된 우리는 사랑하는 자로 변해가고 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지어져가면서 천국을 맛봄이 결혼이고 가정이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신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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