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01:2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14:1-10)
종교가 타락하면 대체로 네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성직자가 많아지고 종교기관이 많아지며 종교가 기복이 되고 그 종교집단이 이해집단화 됨이다. 성직자와 종교 기관이 많아지면 그들을 먹이고 운영해야 할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돈을 바칠 사람들을 모으고 붙잡아 두려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축복설교로 그들 비위를 맞춰주어야 한다. 그런 집단들은 각자의 욕심과 배를 채우려 모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당연히 전체가 이해집단화 되는 것이다. 자기 종교를 강요하려고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대었던 십자군 전쟁,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든 회교도들의 과격한 포교 활동, 국가 문화재인 사찰 불상의 코를 잘라버리는 행동들은 이해집단화 되어버린 종교의 타락에서 기인한다.
한국을 방문했던 한 외국 신학자가 말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세 가지 밖에 모른다. 첫째가 하나님, 둘째가 자기 자신, 셋째가 돈이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매일새벽예배, 주중 구역예배와 계절별 수련회, 년중 부흥회 등,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예수에 미친 사람들 같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를 다른 나라 신학자가 ‘자기의 욕심을 채우고 현세적 성공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고 혹평한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들 뿐이겠는가? 예수 승천 직후부터 기독교는 그렇게 변질되어 갔다. 스땅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적은 추기경의 붉은 제복, 흑은 판사의 법복을 말한다. 당시 유럽 젊은이들은 자기 꿈을 이루고자 추기경의 붉은 제복을 택할 것인가 법관의 검은 제복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했었다. 성직자가 되어도 충분히 축재하며 권력을 휘두르며 잘 살 수 있었던 당시 풍조를 반영한 작품이었다.
1. 자기 포만을 위한 신앙
그러나 기독교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얼마나 부귀를 누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하느냐에 있다. 이 본질에서 엇나가니 믿음의 여정에서 어려움이 닥칠 때 흔들린다. ‘진짜 하나님이 있긴 있는 것인가?’하고 의심하면서 그 하나님을 부인하기까지 한다. “여러분이 배운 교훈을 거슬러서 분열을 일으키며 올무를 놓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섬기는 것이며 그럴듯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롬16:17-18) 타락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배를 위해 하나님을 섬긴다. 정작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였던 것이다. 신자는 오직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이 핵심에서 벗어나면 우리 삶은 항시 실망이요 괴로움일 뿐이다.
하나님을 이 땅에서의 내 성공을 돕는 분으로만 몰아가면 오늘의 우리 삶에서 설명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예수를 믿는데도 병이 걸리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항시 쪼들리는 신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이 '칼을 주러 이 땅에 왔다'고 했다. 부부가, 부모와 자식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예수 때문에 갈라질 것이라고도 말했다. 거룩에 방해가 되는 것은 친족간이라도 가차 없이 쳐버릴 것이기에 불화도 불가피하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시련이다. 이 땅의 행복을 깨쳐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자로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세상 물질에 매여 사는 인생들에게는 더욱 힘든 것이다. 사람이 남을 돕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색함 때문이다. 왜 인색한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가치가 물질이기 때문이다.
어떤 열심 있는 교인의 자녀가 대학에 낙방하였다. 사람들은 그 교인의 믿음과 기도가 부족한 탓이라고 뒷말들을 하였다. 신앙생활 잘하는 장로의 사업이 어렵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께 잘못 한 것이 있었을 것이라 여기저기서 수근거렸다. 믿는 자로서 이혼했다고 교인들 앞에서 주눅들고 위축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요 기독교도 아니다. 바울도 그런 억울한 평가를 자주 받곤 했었다.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가짜라고 쫓겨나기도 했었다. 걸핏하면 매 맞고 감옥가고 굶기가 일쑤였다. 바울의 신앙이 잘못되었나? 하지만 바울은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만 존귀하게 됨이 신자의 본질임을 강조하고 설파하였다. 그는 이 땅에서 살았지만 이 땅과는 아무 상관없이 살았다. 그것이 신자의 본분이고 본질이어야 한다.
2. 감당할만한 시험
의인 욥에게 고난을 허락한 하나님이 욥의 질문에 뭐라고 대답을 했던가? 욥의 무지와 작음을 가르치고 당신의 크심을 보였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 인간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킨다는 것은 강아지에게 뉴턴의 만유인력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우리 인간은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하게 한 가지는 믿는다. 하나님은 우연히나 우발적으로 일하지 않음을 말이다. 모든 것은 그의 작정과 예정과 섭리 안에서 계획되었고 지금도 그 목표점을 향하고 있음을 말이다. 이해 할 수 없지만 우리 삶에는 고난과 시험이 불가피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죽었다. 간음하다 죽고 하나님 시험하다 불뱀에 물려 죽고 원망하다 죽었다. 고전 10장에 그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오늘 우리에게도 거울이 되고 경계되도록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일이 지금도 일어난다는 말이니 경고의 메시지이다. 사실, 우리에게도 동일한 시험과 시련이 닥친다. 하지만 ‘감당할 시험’만 준다고 하였다. ‘감당할 시험’이란 ‘누구나 겪는 시험’이란 의미이다. 사람들은 고난과 시험 앞에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일을 겪는가?’ 하여 힘들어 한다. 자기가 겪는 시련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럽다고 여긴다. 그러나 누구나 그만큼의 고통은 있다. 아울러 ‘감당할 시험’이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험’이란 듯이기도 하다. 갓 젖병을 뗀 사람에게는 그가 견뎌낼 수 있는 만큼,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그 만큼의 시험,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는 그 만큼의 시험만 주겠다는 것이다. 유치원 졸업생에게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지 않으니 혹 내게 닥친 시련이 다른 이들보다 더 큰 것 같이 보인다면 내가 그만한 수준에 와 있음이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게다가 우리의 경건을 위한 고난과 시험도 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기독교는 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함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냄에 있다. 인간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인 것이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내 필요를 얻고자 나보다 강한 대상에게 대가를 주고 부탁함이다. 그러 우상은 대가를 받되 다른 요구는 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으나 거룩한 삶을 요구한다.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을 순종하는 자로 만들고자 빈번히 시험한다. 예수조차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히5:8) 하나님의 요구와 계획보다 내 욕심을 따라 행동하면 우상 섬김이다. 그렇게 당신 뜻에 순종치 않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분노한다.
3. 피할 길
그러면서 피할 길도 준다. 민13~14장에 그 피할 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포함한 열 두 명의 가나안 정탐 보고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은 가나안에 대한 엉뚱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절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 하였다. 아낙 자손들과 거기 네피림들 앞에 서면 자기들은 메뚜기같다고 보고한 것이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가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자’고 했다.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행하셨듯이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는 것이다. 바로 그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이 피할 길이었다. 하나님은 시련을 주되 반드시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도 함께 준다 함은 그 이기는 길, 그 피할 길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라는 말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정탐꾼들은 여호와의 재앙으로 모두 죽었다. 스무 살 넘은 이스라엘도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 인생들의 말로였다. 거기서 피할 길로 가게 된 이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이었다. 누가 봐도 승산 없는 전쟁이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 승리임을 알았다.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에 쳐했을 때 승산 없는 것 같아 다른 이들에게 복 없는 사람이라고 비쳐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 않고 그 뜻을 따름이 멋진 승리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애굽의 열 가지 재앙, 홍해를 건넘,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임, 반석의 물로 마시게 하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갈멜산 엘리야의 승리처럼 멋지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오늘의 이 시련도 우리 유익을 위함이라는 확신으로 그의 뜻에 순종함이 피할 길이다.
그 길이 스데반의 순교처럼 처참할 수도 있다. 그런 모양이 세상 보기에 분명 패배처럼 보이나 그 죽음은 하나님께 승리의 모습이었다. 예수의 죽음 또한 당시에는 패배처럼 보였다. 그러나 승리였다. 사람들에게 승리의 모습을 보이고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림이 오히려 어리섞은 것이다. 사람들에게 패배의 모습으로 비쳐져도 하나님 뜻에 순종함이 진짜 승리임을 성경은 곳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우리의 거룩을 향한 삶에는 반드시 지나야 할 문턱들이 있다. 그 길이 설령 예수의 길, 스데반의 길, 바울의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가 요구하는 거룩으로 한발 한발 가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없이 정도로 내뻗는 한 발 한 발이 삶, 바로 그 길이 피할 길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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