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이웃

2022. 5. 19. 14:4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15:1-9)

 

바울은 말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1-3). 십계명을 인용한 것인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었다. 출애굽기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20:12)고 약속하였고 신명기에는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5:16)고 약속하였다. 즉, 부모 공경에 장수와 축복 언약이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1.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

'부모를 공경하라'는 부모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계명이 아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가정 안에서 부모에 의한 자녀 학대 사건들이 빈번한 현실이다. 이 세상에는 부모와 자녀 간에 사랑과 공경 외에 폭력과 학대도 존재한다. 그러니 무작정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부모에게 폭력과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무조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면 그것은 부모의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또 다른 악이다. 부모를 공경해야 복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는 학대속에 자란 아이에게 부모에 대한 존경심이 들지 않는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게 한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안에서 많은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최초의 폭력을 경험하는 오늘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강해에 신중해진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효도 언급 바로 뒤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요즘 이 계명은 부모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달리 해석되는 추세이다. 사실, 이 계명은 경제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 부모들이 자녀들 위에 누렸던 권위는 자연스러웠다. 주변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부모 권위에 대한 복종은 이스라엘에게도 매우 중요했었다. 그래서 부모 권위에 대한 도전이나 훼손은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죄로 율법에 명기하였다. 모세는 그의 율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까지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부모 권위에 대한 복종이 너무도 당연하고 그것에 대한 도발이 엄격하게 금지된 상황이었는데 굳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조항을 십계명에 포함시킨 이유가 무엇인가?

 

팔레스틴 땅에 살던 이스라엘 유목민들에게는 우리의 고려장과 비슷한 관습이 있었다. 늙어서 더는 함께 이동할 수 없거나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인들을 남겨 두고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남겨두고 떠남으로써 노인들이 사막에서 죽게 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모세는 그 관습을 금지시킨 것이다.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노약자들도 존중되고 공경 받으며 보호해야 함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취지를 율법속에 명확히 규정한 것이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21:17) 여기서 자기 부모를 '저주하다'는 말은 자기 부모를 '비참한 상태로 방치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신을 부모를 방치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제5계명의 본 뜻이고 그 정신이 예수에 의해 다시 인용되었다.

 

2. 전통과 율법 논쟁

마태복음 15장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찾아와 따지는 장면이 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15:2). 당시 유대사회를 이끌어간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시선이 예수에게 쏠리자 그의 약점을 잡고자 혈안이 되었다. 마침 예수 제자들 중 몇몇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자 이를 근거로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미쉬나)을 지키지 않는다고 따졌다. 율법(토라)이 아니라 이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장로들이 해석한 관습규정을 근거로 문제를 삼은 것이다. 시비의 발단이 된 식사전 손 씻음은 율법에 없었다. 다만 제사장들이 성전에 들기 전에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으라고 한 부분을 확대 해석하여 일반인에게까지 적용한 장로들의 전통이었을 뿐이다.

 

그들의 공격에 예수는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면서 십계명의 부모공경 계명을 한 예로 들었다. 그 부분을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내게서 받을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다" 여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마가는 고르반이라고 소개하였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7:11) 

 

구약에서 고르반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제물, 혹은 예물을 말한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외적 의식과 규례를 강조하는 이들에 의해 이 단어는 일종의 맹세어로 변질되어 작정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물건을 가리키는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고르반'으로 바쳐진 물건은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것이기에 종교적인 목적 이외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고르반'은 아름다운 신앙적 동기에서 출발한 풍습이었지만 장로 전통이 이를 종교적 규례로 강화하면서 변질된 것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봉양해야 할 재화도 고르반이 되었다말하면 더 이상 부모 봉양의 의무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이후 점차 이 전통은 부모와 사이가 나쁜 자식, 또는 부모 부양을 꺼리는 자식들에게 부모에 대한 책임 회피 수단이나 종교적 변명거리로 이용되었다. 결국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원래 말씀을 장로들 전통으로 폐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3.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매게자

그래서 화가 난 예수가 이렇게 말했다. (29:13)"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고르반, 즉 이것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고만 하면 그만인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기에 정작 부모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함이 정말 계명의 진의인가? 고르반 자체는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서원이고 뜨거운 헌신이었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에 무엇이 아깝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예물에 목말라 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예물을 직접 쓸 곳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들은 땅 위 그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당신께 드려지는 모든 것이 우리 가운데 곤궁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되돌려지기를 원한다. 그 사람들이 부모이든 이웃이든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사용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더 이상 부모의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경제적 생산 활동을 할 수 없는 노약자들도 존중되고 공경 받으며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회공동체를 향한 명령이었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돌봄과 정의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십계명 전체에서 연결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 1~4계명과 이웃에 대한 수평적 6~10계명,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제5계명이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첫 번째 큰 계명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을 서로 같은 것으로 만드는 연결고리가 부모 공경이라는 말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로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7-18) 

 

부모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별개가 아니다. 예수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고 하였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10:25-28)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처음 접하는 이웃'이다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주어진 분들이 부모이다. 그 부모는 하나님과 이웃을 이어주는 존재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의 사랑되게 하는 연결자이다

 

마무리

마틴 루터는 말했다. ‘부모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집 나간 자식이 언제 올까 그리워 동구밖 언덕 위에 올라 하염없이 자식들을 바라보는 존재, 이 분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처음 접하는 이웃'이자 내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의 사랑으로 이어주는 하늘의 은혜이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21: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