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4. 14:2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13:18~30)
믿음으로 사는 삶에는 최악의 상황이 오지 않을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19:12~14) 사위들은 왜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까? 소돔에 익숙해 있었고 그 소돔이 좋았기 때문이다. 소돔이 주는 편안, 그 세속의 괘락에 복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1.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이 없는데 왜 또 다른 복음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은 어떤 상태일까? ‘지금 여기가 좋은데 왜 여기서 나가라고 하는가?’ 하는 생각, 성경은 그것이 길가 밭들의 상태라 한다. 자기의 지금 삶에 자족하며 사는 이들은 작금의 자기 삶에 자신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거룩한 씨, 즉 말씀이 떨어지는 상황, 즉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하면 그 씨를 죽이는 것이 세상이다. 실제로 2000년 전 중동 땅에서 일어났었다. 자기들은 제사도 잘 지내왔고 율법도 잘 지켜왔다는 것, 선한 일을 하며 고상하게 살고 있는데 왜 새삼스럽게 회개하라는 것이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떨어졌지만 마귀가 채어가 버리는 그 삶이 길가 밭의 삶이다. 자기 건강, 재산, 명예, 평가에만 관심 두고 사는 인간들은 길가 밭 인생들이다. 예배당에 출입하는 교인이라도, 믿는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 돌짝밭은 무엇인가? 성경은 친절하게 설명한다. 말씀을 받기는 하나 어려우면 곧 넘어지는 인생들이라고.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0~12) 기적을 체험하며 애급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자기들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했었다. 그런데 애굽 군대라는 환난과 어려움이 오자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 역시 하나님보다 세상 현실을, 내일보다는 오늘을 더 중시하는 인간들일 뿐이었다..
가시 떨기는 또 무엇인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못 이겨 열매 맺지 못하는 인생들을 뜻한다. 신앙에 있어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그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믿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신학자들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제단은 두 개였다고 한다.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얻어내지 못한 것을 위한 제단, 즉 풍요의 신 바알에게 드리는 제단들로서 현실적이고 세속적 제단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맘몬도 함께 섬겼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과 재물, 즉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양상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아담들의 모습이다. 아니. 이런 세 가지 양상의 밭들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내제하고 있다. 구원받았다는 우리 안에는 여전히 길가 밭과 가시떨기 밭, 돌짝밭이 작동하고 있다.
2. 악토에 가라지까지
믿음이 있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정작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우리들이다. 삶의 염려들에 노출된 우리의 삶들, 돈 문제, 가정문제, 자녀문제에 언제든지 당면하여 흔들리는 우리들이다. 심지어 재산이 불어나거나 살기 편해지면 믿음이 멀어지고 말씀을 피곤하게 여기기까지 한다. 현실적으로 힘들어서 신앙을 포기하는 이들보다 편해져서 교회를 떠난 이들이 더 많다고 한다. 세인트라 하는 이들 조차도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짝이 혼재되어 있는 지경이라면 과연 이 세상에 좋은 밭이란 있기는 있는 것일까? 없다. 전혀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면 환난과 핍박, 유혹과 염려로부터 어느 누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심지어 성경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를 보면, 애써 좋은 밭이 되었다 한들 그 좋은 밭에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간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뽑을까요?’ 하고 종들이 물으니 주인, 즉 하나님이 ‘놔두라’ 하였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 좋은 밭일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좋은 밭은 없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일지라도 완전한 좋은 밭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길가와 가시떨기와 돌짝밭 모양으로 놔두는가? 게다가 그 와중에 가라지도 함께 하게 하는가? 흙인 밭에는 그 자체로 생명이 없다. 생명은 심기는 씨앗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나의 밭을 갈아서 옥토로 만드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돌짝밭 같고 길가 밭, 가시떨기 같은 내 속에 생명의 씨가 은혜로 심겼다는 사실이 복음이다. 그러니 여전히 길가 밭이요 가시떨기 밭이며 돌짝밭인 내 모습이 드러남이 당연하다. 거기에 실망하거나 낙담하기보다 내 속에 있는 생명 씨 능력을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옥토이고 마지막 날에 완성되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안에 넣어 세상 풍랑 위를 걷는 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그 풍랑에 그대로 놔둠으로써 믿음으로 은혜의 안식을 경험하게도 한다.
내 안의 가시떨기, 길가 상태, 돌짝밭 모습은 은혜를 경험시키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세상 관점과 현실적 이치로는 그 가시떨기 인생과 돌짝 같은 신앙으로서 실패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서 드러나는 가시떨기와 돌짝의 모습을 통해 한 발 더 은혜로 다가간다. 그 인생이 하나님의 ‘남은 자’이고 그런 삶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이다. 그런 신앙 상태, 즉 최악의 믿음 상황을 계속 경험케 함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씨 뿌리는 자 비유’ 바로 밑에 붙어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그 답을 알 수 있다. 즉 두 비유, ‘씨 뿌리는 자 비유‘와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연결된 이야기이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마13:29) 가라지는 나중에 뽑혀 지옥 불에 들어갈 때까지 하나님이 쓰는 용품이다. 나를 이 세상에서 용납하고 용서하는 인격자로 만들어감에 필요한 도구들인 것이다. 우리를 하늘 거룩한 백성으로 훈련시킴에 소품으로 쓰이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3. 내 고단함을 통하여
마찬가지로 내 속의 가시떨기와 돌짝 같은 가라지들이 내 한계와 주제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배움에 필요한 자기 부인의 도구로 내게 허락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길가 밭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에 실망하고 수시로 돌짝밭 모습으로 들키기도 하며 수시로 가시떨기의 자기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는가?’를 경험하게 된다. 내 안에 떨어진 씨, 거룩한 씨가 그 모든 것들을 합력시켜 선으로 완성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키고 부인될 때, 내 안에 있는 생명, 즉 내 안의 예수가 삶으로 드러난다. 바로 그것이 예수가 맺는 열매이고 그런 인생들이 옥토이니 나는 단지 밭일뿐이다.. 밭은 스스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다만 생명을 가진 씨가 밭에 떨어지면 그 밭이 어떤 상태일지라도 거기에서 생명이 열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성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분명하게 약속하였다. ‘새 언약에서 새 마음을 준다’고, 당신의 생명이 자랄만한 마음 밭으로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 가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우리 삶에서 실체로 쓰이는 것이 가라지이다. 그 가라지가 우리 안에서 이따금씩 발견되는 길가 밭의 모습이요 돌짝밭의 모습이며 가시떨기의 모습이다. 이것이 허락된 사람 채찍이고 인생 막대기들이다. 더 크게 보면 이 역사 전체가 그렇고 우리 인생 과정이 그러하다. 결국 그 모든 가라지들, 그 많은 역경들은 내 유익을 위함이다. 생명의 씨앗이 비와 바람, 서리와 폭풍, 타는 뙤약볕을 받아 그것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흙은 어떤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그것으로 망할 뿐이다. 쓸려내려 가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뙤약볕이 내리쬐며 서리가 내릴 수 있다.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 한다. 그것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니 참고 견딜 힘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오늘은 어떤가 우리의 지금 삶은 어떠한가? 예수를 믿는 인생임에도 여전히 미성숙함에 괴로운가? 그때가 내 안의 죄악들이 가라지로 드러남이다. 바로 그 순간이 내가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이니 자기에 대한 신뢰를 내려놓는 시간이다. 진짜 믿음 있는 이들은 그런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런 말을 한 것이었으리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4~26) 믿는 내 삶에 어려움이 오고 그 곤고함으로 인해 시험에 드는가? 그때 죽자. 내가 기대하고 욕망해 왔던 세상에 대하여 죽어보는 것이다. 세상의 공격인 가라지가 내 성숙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이 산다. 그런 사람들이 열매를 맺는다
결론
홍해 앞에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뭐라고 했던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4)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해 나가는지 이 과정에서 경험해 보자. 그런 삶이 옥토이고 그런 자기 부인과 십자가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이다.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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