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3. 14:5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1:1~2)
창조 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 하나님이 보이는 것들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시간이 시작되었고 물질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태초에 한꺼번에 일어난 사건이다. 시간이 물질의 존재로 성립되었다. 즉 시간은 물질의 존재방식이 되었다. 시간 없이 물질이 있을 수 없고 물질 없이 시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만물은 시간 안에서 존재하고 시간 안에서 소멸된다. 그렇게 시간과 물질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 그러니 태초 전, 시간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 이외의 존재가 없었다. 그러니 ‘천지 만물이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표현의 아름다움과 타당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1. 첫 창조에서 새 창조로
태초의 그 창조 진행은 지금도 우리들, 여기 지구, 우리 일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영원’이라고 하고 그 영원은 우리 삶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 영원에서 창조를 계획하였고 완성된 당신의 나라를 그렸다. 그 영원에서 창조된 시간과 존재의 이 물질세계는 말씀대로 소멸될 것이고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시간과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영원만 남는다. 우리는 육체를 벗어나 이 영원으로 들어가니 인간은 죽는 순간부터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이지 영혼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의 존재 방식은 시간이고 영의 존재 방식은 영원이기에 ‘영원한 지옥’ 또는 ‘영원한 천국’이란 말을 하여 왔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훗날 새 하늘과 새 땅인 그 영원에서도 ‘육신’을 입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육신은 지금의 이 ‘물질’로서의 육신이 아닌 ‘새 육신’이다. 지금의 이 육신처럼 시간을 존재 방식으로 하지 않는 새 육신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부활한 몸으로 벽을 뚫고 오고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태초에 창조된 에덴 공간과 아담이란 존재에서 이미 그렇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암시하였다. 동시에 물질세계에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상징하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첫 창조가 완전했다는 말은 무엇인가? 또 그 속에 있던 인간이 하나님 보기에 좋았다는 말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첫 창조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말이 아니었다.
전체 작정에서 그 첫 창조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만약에 그런 첫 창조가 목적이었고 그 목적에 맞게 완전한 창조였다면 피조물이 타락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악과 사건은 무엇인가? 창조자가 예상치 못했던 우발적이거나 돌발적 일이었나? 그 또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에 죄를 계획하거나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는 아담의 삶에 ‘죄’라는 것이 들어올 수 있었나? 그것은 신비이다. 전문 표현으로 제 1원인인 하나님은 제 2원인인 인간의 의지나 감정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 이성과 논리 너머
하나님은 당신이 작정한 일들이 자유롭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일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죄와 상관없는 이들에게 죄를 강요하였다면 심판의 근거도 없다. 선악과 사건을 비롯한 이후 이 땅의 모든 이들의 죄들은 하나님이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마귀 세력에게 준동되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저질러 왔다. 다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사람이었고 시간들이었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논리로는 이해가 어려운 논리들이다. 다만 신앙으로 사는 이들은 논리를 넘어서는 부분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형제들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을 때, 형들은 질시의 마음에 자신들 자유로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용하여 만민의 생명을 구하는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50:19~20) 형들이 요셉 판 것을 하나님이 시킨 것이 아님에도 모든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대로 흘러간다는 것,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이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고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분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계시의 시작인 성경 서두 창1:1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분의 존재를 전제하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선포 한다.
우리는 이 선포를 믿는다. 믿어지니 믿는 것이다. 인간은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것 외에는 비밀로 감추어 두었다. 아니 알려 준다 한들 우리의 이성으로는 그것들을 모두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감춘 그것을 밝히겠다고 억측과 상상의 논리들을 펼친다면 그 자체가 악이요 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내용만큼, 아니 꼭 그것만 성경을 통해 계시해 놓았다. 그렇게 첫 창조로 시작된 인간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작정 속에 가시적으로 암시되고 형태화 되어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그러니 첫 창조 세상과 진행되는 오늘의 창조도 이 관점에서 해석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역사와 만물은 나의 욕심을 채우고 내 명성과 자랑을 쌓으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오늘에서 내일을
이 역사와 만물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알맞은 자로 지어져 가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감이다. 신학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창조의 회복’이라 말한다. ‘창조의 회복’, 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어디인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해이고 왜곡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의미로서의 ‘창조의 회복’이 아니다. 이미 첫 창조에 새 창조의 내용이 충분하게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혹 그것이 에덴으로의 회귀라면 거기는 또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곳일 뿐이다. 그 처음 창조 에덴은 죄의 인간 가능성이 있었던 불완전한 그때 거기였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의 회귀이다. ‘구원’은 창조 때 그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 목적 회복, 즉 ‘완성된 새 창조’인 것이다. 첫 창조를 통해 새 창조를 암시한 하나님, 첫 창조를 말씀으로 무에서 해낸 것처럼, 새 창조도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는 것이 구원이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런 면에서 첫 창조 없이는 새 창조를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새 창조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첫 창조부터 시작해 타락과 구원, 그리고 그 나라의 완성으로 실현되어 간다. 그래서 첫 창조가 없으면 구원도 없고 새 창조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 수준에 맞추어서 원래 목적이었던 ‘구원의 완성’을 시간의 시작부터 ‘창조, 타락, 실낙원, 구원, 새 창조 완성’이라는 구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묵시 속에서 이미 이루어져 있는 그 나라를 첫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속에서 실현시켜 가고 있다. 그러니 첫 창조 없이는 새 창조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고 왜 인간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불완전한 첫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루의 시작을 저녁이 되며 아침이 오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기독교 외의 종교에서는 창조의 부정, 또는 거부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런 종교에서는 ‘창조’가 의미가 없다. 아니 창조는 더럽고 악한 것이다. 창조를 부정하고 멸절시킴을 ‘구원’이라 보기에 ‘창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시대정신들은 어떤가? 물질주의, 유물론, 자연주의 등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바로 그것이 ‘죄’라고 정의한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부인하는 모든 행위가 죄인 것이다.
결론
창조자를 부정하는 마귀들이 역사에서 내놓은 성과들, 그리고 그 영향력들은 실로 막강했다. 무신론을 주장하여 창조가 없었다고 하니 당연히 창조자도 없고, 신 따위는 없었다고 내세웠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자기보다 힘센 자가 있다니? 나를 벌 주는 존재가 있다니? 그런 것이 싫고 또 믿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신은 없다는 말이 공감되었고 있던 신도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창조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이 오늘도 세상을 다스리고 죄인들을 벌하며 당신 백성들에게는 상 주는 분임을 믿는다. 그래서 경외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믿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의 오늘은 하늘의 경건으로 사는 시간들이다. 창조자 하나님이 캄캄한 지금을, 혼돈스러운 작금의 삶에서 창조적 내일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계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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