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1. 23:0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12:38~39)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체험은 신비적 체험이나 소원이 척척 이루어졌던 것에 대한 체험이 아니다. 기독교적 체험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는 것, 풍파 많은 현실 삶에서도 여전한 하늘 소망을 경험하는 체험이다. 그래서 빈번하게 그런 체험을 했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2~13)
1. 감정과 느낌 그 이상
많은 신앙인들의 가정이나 사업장에서 바울의 이 고백을 걸어놓는 액자를 자주 본다. 특히 그중에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무구가 압권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이 감옥에서 쓴 문구였다. 그런 맥락과 배경을 안다면 이 구절을 집안 현관에 멋지게 걸어둘 수 있을까? 하나님이 능력을 주었기에 감옥 같은 비천과 배고픔도 이겨낼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기독교의 체험은 바로 이런 체험을 말한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기분이나 느낌만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정확한 성경 이해가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듣고 읽어서 이해가 되면 그 이해가 가슴으로 내려와 정서가 되고 삶으로 의지화 되는 것이 신앙이다.
느낌상으로는 조선소에 쌓여있는 철판 조각들을 볼 때 그것들이 물 위에 뜬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 그 철판들, 또 그것들로 만들어지는 엄청난 크기의 쇳덩어리가 배가 되어 물에 뜬다. 놀라울 뿐이다. 부력의 원리, 즉 물속의 물체는 그것이 밀어낸 물의 양만큼 가벼워진다는 것, 이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로 계산하여 엄청난 크기의 배를 띄우게 된 것이다. 인류가 느낌만으로 판단하고 살아왔다면 배는 물론이고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것들이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느낌이나 기분으로만 하는 신앙은 성숙할 수가 없고 진보할 수가 없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색, 그리고 깊은 통찰이 함께 가야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기독교 신앙을 신비적 체험이나 주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주장하고 믿는 논리는 언제나 한결같다. ‘예수도 기적을 일으켰고 사도들도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일한다는 것,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기에 믿음만 있다면, 당신께 헌신만 한다면 병도 물리쳐 주고 물질도 풍성하게 채워 주며 하는 일의 성공도 이루게 해 준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이다. 분명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오늘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솔직히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 또한 우리들의 공공연한 심정이다.
2. 인간의 개념과 달리
그러나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복은 우리의 복 개념과는 다르다. 매우 다른 복이다. 그 복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 하늘 백성으로 기뻐하는 복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복처럼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인가? 예수가 행한 기적들은 그의 신적 기원과 그의 할 일,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싸인들이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5:36) 성경, 특히 복음서에는 예수의 기적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행한 기적들이 일곱 개 등장한다.
그러나 그 기적들은 예수의 그리스도적 정체성과 관련된 기적들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하려는 것, 그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자 행한 것이지 삶의 현안 해결을 위한 기적들이 아니었다. 혹 우리의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적을 행한 것이었다면 왜 일일이 찾아다녔겠는가? 산 높은 곳에 올라가 한꺼번에 ‘병 걸린 사람들 다 나아라.’ 하면 될 것을 말이다. 요한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기적은 가나의 혼인 잔치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었다. 비어있던 여섯 항아리에 물을 채우시고 그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위선적 행위로 포장되어 있던 유대인들의 허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잔치가 진짜 잔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의 피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이적이었다.
물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을 행할 때 씻는 물을 담는 항아리였다. 그런데 그것이 비어있었음은 그들이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행하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그러니 그 이적은 단지 세상 잔치를 흥겹게 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로 인한 진짜 기쁨과 넉넉함이 올 것을 싸인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둘째 이적은 왕의 신하 아들을 고친 사건이었다. 예수의 질병 치유는 장차의 천국에는 죄로 인해 온 질병들이 없는 곳을 상징한다. 질병이 왜 생겼나? 죄의 오염으로 하나님에게서 공급받아야 할 생명이 결핍된 결과였다. 그러니 인간 세상의 질병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사망의 맛보기인 셈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결여된 증거이고 이미 뿌리 뽑혀버린 나무이기에 죽어 가는 증세이다.
3. 모든 것이 가능하기에
예수로 인해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늘 복, 그 생명으로 살기에 질병이 물러가고 없다. 그래서 셋째 이적으로 이어진 것이 38년 된 병자 치유 사건이었다. 이 또한 상징이었다. 혹 예수가 온 목적이 병자 치유라면 수많은 병자 중 왜 38년 된 병자 하나만 고쳤겠는가? 그 이적은 인간들의 영적 상태 표현이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그 같은 질병자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기 위해 일어설 수조차 없는 약하고 제한된 존재들이었다.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소경이었고 정상적인 길을 걸을 수 없었던 절름발이였으며 생명력을 잃어 혈기 마른 자들이 실상 우리들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께서 찾아와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이다.
그러니 요한복음의 네 번째 기적인 오병이어 사건은 바로 그 예수가 생명의 떡임을 상징한다. 그 떡으로만 우리가 영원히 주리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복음을 설명함이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하나님 나라,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상징 사건은물 위를 걸으신 기적으로 이어졌다. 사는 날들의 외적 역풍들과 불안, 염려, 욕심 등 내풍에 시달리며 사는 우리들, 그런 우리 사정을 다 알고 함께 하는 예수, 혼자 헤어날 수 없는 그 현장에 함께 있다는 싸인인 것이다.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는 피조 세계를 초월해 존재하는 하나님이요 모든 것이 가능한 분이다. 그런 분이 왜 역풍이 부는 풍랑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가? 인생의 고난, 그리고 죄로 인한 고통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소경을 고치는 기적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 참 기구한 운명이다. 왜? 어쩌다가? 누구 때문에? 이런 세속적인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의 대답은 엉뚱했다. 부모의 죄도 아니고 그의 죄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란 것, 그 소경을 찾아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주고는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했다. 하나님이 이겨져 흙이 된 것, 죄인과 연합되어 예수 자신이 그렇게 씻겨짐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복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기적의 절정은 죽은 나사로를 되살림이었다.. 여기서도 예수는 사전에 나사로가 죽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 말했다. 부활과 생명인 예수로 인해 죽어있던 우리가 사망에서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을 최종 정리해 준 것이다.
결론
요한복음의 기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예수의 신적 기원과 그의 할 일인 십자가, 그리고 복음이 상징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그럼에도 진화론적 사고에 물들어버린 우리는 뛰어나야 살아남고 성공해야 인정받는다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나고 잘 안 풀린 사람을 신앙인임에도 자기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음을 믿는 이들이 기독교인들이다. 모든 사람, 모두의 인생들을 나름대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안에서 존재함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믿는가? 정말 믿어지는가? 아닐 것이다. 세상 상식의 지배를 받는 이들은 믿지 못한다. 그러니 만사형통 하고 불치병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들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믿음이 기적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사4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