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0. 23:2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4:1~10)
큰 일을 치르려 기도하고 준비했는데 미진하게 끝나는 경우가 있다. 명분으로도 부족한 없고 하나님 앞에서도 마땅하다고 믿어 추진했는데 결과가 시원찮은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도 그런 경우들이 종종 소개된다.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교회’ 뒤에 ‘일곱 영’이 언급되는 성경 어구들, 이는 완전한 ‘성령’을 상징함이다.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짓는다는 것, 즉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 창조한다는 것으로서 교회를으로서 탄생시키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한다. 그러니 교회는 성령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
1. 일곱 영과 일곱 눈
일곱 영이라 표현된 성령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계5:6) 스가랴서의 일곱 눈은 온 세상을 두루 살피는 여호와의 눈이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일곱 눈은 온 세상에 보내어진 하나님의 영이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스가랴서 4장 내용은 환상이었다. 스가랴에는 7개의 환상이 나온다. 그중 이 이야기는 다섯 번째 환상인데 하늘 성전 즉, 하나님 나라를 상징 한다.. 천상의 나라, 즉 성전을 묘사하면서 그 성전이 지어져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 모습 설명에 어떤 것들이 등장하는가? 일곱 촛대와 양 옆의 두 그루의 감람나무가 있다. 그런데 그 등대로 감람나무에서 계속 기름이 흘러들어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언자 스가랴가 묻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력으로도 되지 않되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된다’ 천사의 대답은 친절하지 않았다. 난해하였다. 그리고는 성전을 재건하는 스룹바벨 이야기로 이끌고 들어가니 이 모습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성전 모습, 즉 진짜 교회가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이었다. 이 환상에서 나오는 스룹바벨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었다. BC 586년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성전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을 귀향시켰다. 그때 귀향민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여호야긴의 손자가 스룹바벨이었다. 그는 유다 왕국의 정통성, 즉 왕족 신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귀향민 속에 돌아온 그는 스가랴 선지자와 함께 BC 520년경부터 성전 재건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의 재건 공사에는 엄청난 방해들이 있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다리오는 애굽의 충성을 확인하고자 군대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 군대 정비 일정이라는 불똥이 유대인 자신들에게 튈까 초조했고 북이스라엘이라는 사마리아인들 또한 재건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스가랴가 절망하고 의지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정말 이 성전이 재건될 수는 있을까?’ 그때 스가랴에게 ‘스룹바벨이 재건을 시작한 성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환상이 보인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힘을 얻은 성전 재건 사업은 결국 BC 515년에 완성되었다. 스가랴나 학개, 에스라, 느헤미야 모두 이즈음의 성전 재건에 관한 내용들이다. 이는 모두 옛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짓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창조하는, 즉 이전이 율법을 해체하고 교회를 탄생시키는 예수의 사역을 상징한다.
2. 오직 성령으로
그래서 예수도 ‘이 성전을 무너뜨려라. 내가 사흘 만에 새로 짓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이 환상에서 스룹바벨은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고 하였다. 그렇게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 묘사가 스가랴서 4장의 일곱 촛대와 두 감람나무이다. 일곱 촛대는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이라 했으니 성령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는 이 일곱 촛대를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1:20) 일곱 촛대가 일곱 교회라 하였으니 그 일곱 교회는 전체 교회로서 우리들이다. 이렇듯 성경에서 일곱 촛대는 성령으로 표현도 되고 교회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교회와 성령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이렇게 교차적으로 표현되는 것인가?
예수는 교회를 탄생시키고 하늘로 갔다. 그리고 이후에 당신의 영, 즉 성령을 보냈다. 그 성령이 교회인 우리 안에 들어와 나를 이끌어감이 하나님의 성전, 즉 교회의 모습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6) 그러니 스가랴서의 환상은 예수가 보낸 성령으로 세상을 사는 우리 모습이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기름이 공급되고 있으니 그 기름이 성령인 것이다. 교회는 성령의 도래로 탄생되었고 그 성령의 조명과 인도와 충만으로 존재하고 있다. 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내가 사는 이 땅에서도 그 교회로서 빛을 발하며 살고 있다.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부어지는 성령의 도움으로 영원히 빛을 발하며 산다. 즉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인 것이다.
그럼에도 왜 성경은 일곱 촛대를 또 성령으로 묘사하는가? 이유는 명확하다. 교회가 성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유지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촛대에 불이 붙어서 그것이 촛대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불이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교회와 성령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래서 일곱 촛대를 성령의 도움으로 탄생되고 빛을 내는 교회라 표현한 것이다. 출애굽기 25장 31~40절에는 촛대와 감람나무의 구체적이고도 긴밀한 관계가 잘 묘사되어 있다. 촛대를 비롯한 성막 전체가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준 당신 나라의 모형이었던 것이다. 성막에 놓일 촛대를 정금으로 만들라 했던 것도 당시에 금이 빛을 상징하였기 때문이었다. 촛대는 지성소 앞의 성소에 위치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이었다.
3. 불을 꺼뜨리지 말라
그 촛대에 불을 밝혀 1년 365일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지 않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교회는 불이 꺼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교회는 영원함을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람유를 끊임없이 촛대에 부어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명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켤지며 아론은 회막 안 증거궤 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의 등잔들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레24:1~4) 제사장들은 바로 그 일을 했다. 이것이 촛대와 감람나무로 등장한 스가랴의 환상이었다. 옛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감람나무 기름을 부지런히 날라야만 했었다.
성막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고 그 성막 안 촛대는 그 나라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들, 바로 교회라는 우리들이었다. 이런 교회는 성령의 기름으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령 하나님은 영원하다. 그러니 교회인 우리도 영원히 빛을 발하게 된다. 실상 그 불은 이미 2000년 전 오순절에 성령이 교회에 옴으로 켜졌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7~18) 여기 ‘주의 영광을 보다’는 원문 동사 ‘카톱트리조마이’는 시제가 ‘현재형’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의 영광된 빛을 반사하는 촛대로 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삶은 어떤 삶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다른 것이 아니다. 빛으로 온 분 예수가 살다 간 그 삶을 사는 것이 빛을 발하는 삶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예수는 이 세상에 온 빛이었다. 교회는 그 빛을 그대로 흉내 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이 어떻게 살다 갔던가? 삶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갔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내 삶으로 하나님을 증거 해야 한다.
결론
하나님의 증인, 빛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만사형통, 일사천리, 여유만만은 언감생심이다. 그 삶에 손해와 인내로 인한 어려움은 상수이다. 이 힘겹고 두려움에 자신감을 잃어갈 때 교회로 교회 되게 함은 내 힘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이런 것이 우리의 평강이고 오늘의 하수상한 세월에 누리는 하늘 능력이다. 사노라면 견디기 힘들고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이 쌓여간다. 그래서 도저히 더 이상은 못 갈 것 같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삶은 이미 성령 아래에 있다. 우리 안에 예수의 영이 산다. 그 성령이 나를 지옥으로 데려간들 나에게 일곱 개의 눈과 함께 하기에 내 신분, 나의 삶은 안전하다. 그러니 오늘 우리 삶에 닥친 상황과 조건들, 이 난망한 일들이 무섭지 않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