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 15:4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막5:25~34)
12년간 하혈한 여인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정상적인 생리가 아닌 지속적인 자궁 출혈, 철분이 든 비타민도 없었던 당시에 먹는 것도 부실했기에 그 긴 기간 동안 하혈해왔다면 아마도 그녀의 몸은 거의 반 시체상태였으리라. 그 병으로 수많은 의원을 찾아다니느라 돈도 다썼고 병은 더 심각해졌다. 좋다는 약, 온갖 민간 처방 등 그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허사였으니 최악의 상태로 치달은 것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율법에 이런 병 앓는 여자들을 문둥병자처럼 부정한 인간으로 취급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혈루병 여자는 마을에서 함께 살 수도 없었기에 공동체 예배에도 함께할 수 없었다.
1. 오직 믿음 하나로
그런 처지의 여인이 사력을 다해 예수를 찾았고 그의 겉옷 가를 만졌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는 더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마9:20) 그녀가 손을 댄 옷술, 당시 유대 남자들의 겉옷은 그 아래에 술을 달았었다. 그 옷술은 율법의 상징이었다. 남자들은 그 옷술을 보며 율법을 상기하고 묵상하곤 했다. 역설적이게도 율법에 의해 정죄받는 부정한 여인이 그 율법을 잡은 것이다. 율법의 규정대로라면 여인의 그런 행위는 정죄를 받아 죽음 당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일말의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 어차피 자신은 부정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수의 능력에 의지하면 살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믿음이었다.
여인이 예수의 옷술을 만지자 과연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 이 능력은 어떤 능력이었을까? 예수가 능력을 100% 정도 충전하고 다니면서 고칠 때마다 조금씩 나가는 그런 능력이었을까? 여기 말하는 ‘능력’이라는 ‘뒤나미스’는 ‘메시아적 능력’을 말한다. 죽어야 할 부정한 자가 죽고 메시아 능력으로 새로 살아나는 능력, 즉 부활을 뜻한다. 그러니 예수의 치유라는 구원이라는 사역에 이 단어가 사용되곤 했다. 그런데 병이 나았음에도 어쩐 일인자 여인은 기뻐 뛰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기시감이 든다. 베드로도 부활 예수를 만났을 때 가득 고기에도 기뻐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었다. 백부장도 ‘주여, 내가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했다. 베드로나 백부장이나 여인이나 죄인들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경외감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 예수로 인해 주어지는 생명, 혈루증 여인 이야기는 바로 그 구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여인을 만날 때 예수는 어디로 급히 가던 중이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기에 거기로 급히 가고 있던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그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뭐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막5:35) 그럼에도 이미 병이 나은 혈루증 여인에게 예수는 굳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하라‘고 말했다. 이는 사싷상 조급해 하는 야이로에게 말함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하여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막5:36)
2. 진짜 믿음으로
야이로는 어떻게 예수를 알았을까? 정말 죽어가는 자기 딸을 살릴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의 믿음은 소문에서 시작되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다. 그 소문에서 믿음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되지만 그 믿음은 시련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으로 자라 간다. 야이로 회당장의 이야기는 이 점을 말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는 믿고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믿음의 시련을 만난 것이다. 한 시가 급한 와중에 혈루증 여인이 나타나 예수의 갈 길을 지체하게 만들었고 그 지체 중에 딸이 죽었다. 야이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절망이었다. 그때 예수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이미 죽었고 다 끝났는데 무슨 말인가? 믿는 것도 어느 정도 실낱같은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딸이 죽었다.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 야이로의 심정이었다.
사랑하던 딸이 죽을병에 들었기에 마지막 희망으로 찾아간 예수였는데 지체하는 바람에 딸이 죽었다.그런데 그 상황에서 믿음을 요구하는 예수의 말이 낮설지가 않다. 그렇다. 나사로의 누이들에게도 같은 태도였었다. 그때도 굳이 늦게 가고는 한다는 말이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했었다. 왜 예수는 매번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거기서 믿음을 요구할까? 우리의 믿음은 자라야하기 때문이다. 자라서 죽음을 이기는 진짜 믿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가 없애버린 사망을 이기는 믿음을 우리 삶에서 실력으로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런 믿음은 사망을 겪고 이겨내는 시련을 통해서 성장한다. 절망적이나 하나님이 개입하니 비로소 소망이 보이는 믿음은 그렇게 자라 간다. 세상 모두가 버려도 하나님은 외면치 않는다는 믿음은 그런 막다른 상황에서 생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했던 하나님, 정말 갈 데까지 끌고 갔었다. 이는 그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왜 한나의 태를 그렇게 오랫동안 닫았었던가? 그녀의 믿음을 위해서였다. 절망에서 믿음을 요구하는 하나님, 야이로에게도 그 절망에서 끝까지 예수를 붙들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믿음이 딸을 살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서 외쳤다. ”소녀야! 일어 나라.“ 그 시로 소녀가 살아났다. 이렇게 시련을 통해 자라난 믿음이라야 살면서 겪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이겨낼 수 있다. 이 믿음은 빈부귀천이 없다.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는 빈부귀천이 없음을 말한다. 믿음에는 유지인 회당장의 것이나 부정하고 가난한 혈루증 여인의 것이나 차별이 없다.
3. 기적을 넘는 믿음으로
그렇게 성경은 완성되었다. 그 기록들로 예수가 누구인지도 계시가 되었다. 이제 부정한 것과 부정하지 않은 것들이 예수 안으로 모두 숨겨져 깨끗해졌다. 그래서 구약에서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의 상징이었던 인생들이 예수 치유에 등장한 것이다. 병든 자, 문둥이, 소경, 귀머거리, 말 어눌한 자,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면서 부정한자, 저주받은 자들이 예수로 인해 치유되었다. 그렇게 깨끗케 하는 예수를 이제 기적과 신유로 설명할 필요도 없어졌다. 물론 내 아이가 아파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그 병을 치유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양상이 초대교회 때처럼 은사로 존재할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바른 이해에 서 있지 않으면 오독으로 인한 유혹에 노출된다. 감정이나 기분, 또는 자기 경험에 쉽게 흔들리는 우리에게 마귀가 가짜로 미혹해 오기 때문이다.
대체로 신앙생활을 기분이나 감정으로 하는 사람들은 쉽게 신비주의에 빠진다. 병 고침이나 축귀라는 신비한 경험들에 심취되면 정작 추구해야 할 것을 놓치게 된다. 그것이 마귀의 노림수이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하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사53:4) 이 말은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었다. 그 예수가 사망 증상인 질병을 다 짊어지고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으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마8:16~17) 즉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은 모두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행했던 기적들도 예수가 여전히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계시 차원이었지 사도들에게 임한 어떤 능력을 보여줌이 아니었다. 훗날에 바울 같은 사도는 자기 몸은 물론이고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의 위장병조차도 고치지 못했다. 성경이 완성되면서 그런 기적들의 의미가 밝혀졌기에 이제는 믿음만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질병과 귀신 들림,, 죽음 같은 것들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을 총칭하는 개념들이다. 그러니 ‘귀신 들림’ 이란 정의는 예수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 풍속과 원리를 좇아 사는 삶, 복음과,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들은 암에 걸리고 불치병에 걸림을 질병이라고 정의하지만 성경적 관점의 질병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적 불구자, 영적 감염자들을 가리킨다. 현실의 악하고 음란한 세태가 보이는 표적을 구하지만 그런 이들이야말로 마귀에게 붙들린 인생들이다.
결론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다시 병에 안 걸리던가? 정신 이상자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영원히 살던가? 오히려 병에 걸렸을 때 유한에서 영원을 소망하게 되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복이 아니겠는가? 진짜 기쁨은 그런 것에서 나온다. 이런 믿음의 능력을 소유한 이들이 복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영적의 기쁨을 육적 기쁨으로 바꾸려고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이 귀신 들린 인생이요 병든 믿음이다. 마귀는 복음에 의한 영적 기쁨이 아닌 육적 기쁨으로 우리를 부추겨왔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즐거움, 영적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치료를 경험하지 못했어도, 기적을 보지 않았어도 영생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런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유출병 있는 자의 앉았던 자리에 앉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 있는 자의 몸에 접촉하는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유출병 있는 자가 정한 자에게 침을 뱉으면 정한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레1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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