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삶에서

2024. 10. 20. 14:4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유다가 또 가사와 그 경내, 아스글론과 그 경내, 에그론과 그 경내를 취하였고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무리가 모세의 명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 (삿1:16~21)

 

처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여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했던 존재였다. 그런 인간들이 다른 것들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런 인생을 가리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이생들'이라 한다. 외투 한 벌과 금덩이와 은덩이를 조금 숨겨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아간은 그런 인간들 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그런 인생 위에 아골 골짜기를 쌓았다. 그런데 그 아골 골짜기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다. 그것으로 우리에게 아골 골짜기는 소망의 골짜기가 되었으니 곧 십자가의 복음이야기였다. 사실, 모든 인간은 아간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돌무더기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돌무더기에서 하늘 백성으로 새로 창조되었으니 그 사건을 복음의 메시지로 읽어야 한다.

 

1. 못한 것과 안 한 것

유다 지파를 포함한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갔지만 어느 한 지파도 예외 없이 가나안 사람들을 남겨두었다. 왜 남겨 두었을까‘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삿1:28) 그들을 종 삼고 그들 문명과 편익들을 사용하고 싶어서, 그들 가나안의 풍요를 누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쫓아내지 않았다'가 아니라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인가? 쫓아내지 않은 것인가? 전후 맥락을 볼 때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라 자의적임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삿1:19)

 

하나님이 유다 지파와 함께 했는데 골짜기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왜? 가나안의 철병거가 여호와보다 강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여기서 철병거는 이스라엘에게 무서운 것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등장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은 그 철병거를 자기들이 사용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철병거를 만들어낸 골짜기 거민들을 진멸하지 못했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분명 그 철병거가 여호와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가나안의 문물인 철병거가 마음에 들었기에 그것을 만들 수 있는 자들을 쫓아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왜 쫓아내지 못했다고 기록하였을까?

 

그것은 세상적 힘과 가치가 주는 매력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함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들, 하나님 없는 인생들은 가나안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았다가 아닌 쫓아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이 관점은 영적 전쟁을 치르며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거부하지 못할 만큼 다가오는 세상 편의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 정도의 그 매력, 그 강력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쫓아내지 못했다는 성경 기자의 관찰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천착되는 질문인 것이다.

 

2. 그 치명적인 유혹

결국에는 하나님이 진멸하라한 그 세상 유혹들이 너무 좋아서 두고두고 사용하고 부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겨두었던 이스라엘은 이후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진멸 아래 놓이는 삶을 초래한다. 하늘 백성들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우선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세상 다른 것을 더 의지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을 통하여 바로 이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다. 단지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 아니었다. , 그런 것이었다면 하나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가나안 거민들이 사는 그 땅으로 이스라엘을 집어넣을 필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비어있는 좋은 땅이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굳이 철병거와 온갖 문명으로 무장한 땅으로, 이런 매력과 저런 유혹거리가 넘치는 가나안 땅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들여보냈다. 왜 그랬을까? 그런 것들의 허구와 부질없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가르치려 함이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 절대성과 당신에 대한 의존적 삶의 필연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저주받은 함의 땅 애굽과 가나안의 후예들이 세운  가나안, 두 땅을 철저하게 경험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지리멸렬하게 되는지를 경험케 하려는 것이었다. 은혜를 입은 셈의 후예들은 왜 그 저주받은 세상 땅의 원리로 살면 안 되는지 그것을 깨닫게 하고자 가나안 정복전쟁까지 이스라엘에게 허락했던 것이다. 그 정도로 세상의 매력은 치명적이다. 그 유혹이 너무도  강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가 없다. 

 

그러기에 십자가가 필요함을 드러낸다. 사실, 셈의 후예들인 이스라엘은 저주받은 함과 가나안의 후예들과 다르지 않다. 이 사실은 다른 곳도 아닌 가나안 땅에서 밝혀졌다. 선민 이스라엘이라 하나 다 같은 노아의 후손들, 즉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필요했다. 이 땅에서 약속의 땅 정복 전쟁을 치르며 사는 우리나 세상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대단한 삶을 목적으로 사는 이들이 아니다. 똑같이 불가능한 존재이지만 은혜로 사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의 뛰어남과 별다름을 보이는 존재,혹은  나 자신을 증명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 정복 전쟁이라는 현실에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서 당신 외의 다른 것들을 몰아내고 준비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가 한다.

 

3. 그래서 믿음

그 하나님의 열심 앞에 우리는 점차 나를 죽이는 하늘 백성이 되어간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자 여호수아를 앞세워 가나안으로 진격시켰다..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무슨 말씀을 했던가“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수1:4~7)

 

요약하면, 이 전쟁이 당신의 전쟁이니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라는 것, 걱정 말고 당신의 말씀을 잘 지키면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는 것, 마치 창세기 때 아담에게 했던 명령과 흡사하다.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서 네게 준 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그렇게 주려는 땅으로 가서 그 땅을 밟으라 함은 아담에게 주었던 선악과를 손대지 말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씀과 똑같았다. 현실 가나안을 사는 나 자신에게 매일처럼 확약하는화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담은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땅에서 일개 선악과에게 정복당해 버렸다. ? 그것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것이 대적자 사단의 힘이다. 믿음의 대적자가 지닌 무기는 혐오스럽거나 무서운 모양이 아니어다. 보암직 하고 먹음직도 한 모습으로 다가와 유혹한다. 바로 그런 것이 사단의 공격이다.

 

아간이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 또한 가나안의 철병 거와 문명 앞에서 그렇게 당하였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세상의 힘 앞에서 그렇게 당한다. 그것이 우리 피조물들의 약점이고 한계이다. 그러니 보이는 세상에 길들여진 우이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영원자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호수아 앞에 나선 한 인물, 그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가나안 땅 분배 과정에서 돌연변이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갈렙이었다. 어쩌면 메시아적 표상으로 등장한 임물일 수도 있다. 아직 정복되지도 않은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나누는 현장에서 모든 지파들은 기대감으로 좋은 땅이 뽑히기를 기원하며 제비를 뽑고 있었다. 그런 현장에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헤브론 땅을 달라 하였다. 그는 믿음으로 사는 인생들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결론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유다 지파는 때로 메시아 예수를 상징하는 지파였다. 땅의 모든 인간들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대적의 무기에 넘어가기 마련이지만 그 유다지파의 갈렙은 나는 보기에 좋은 것에 관심이 없으니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을 주오하고 나섰다. 물론, 여전히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다른 땅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언약으로 준 헤브론 땅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땅에는 아낙 사람들, 즉 가나안 거민 중에서도 가장 장대한 거인 족이 사는 땅이었다. 게다가 쓸모도 없는 산지였고 당시 갈렙의 나이도 이미 85세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에 성경은 그의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수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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