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3. 14:5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18:21~35)
멘부커상에 이어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국의 작가 작품 중에 '소년이 온다'를 최근 읽어 보았다.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엄청난 살육을 일삼았기에 그 피해자들의 원한과 황망함이 지금도 여전함을 작품에서 느꼈다. 그럼에도 가해자들, 또는 그 편에 선 자들은 이제 과거를 잊고 미래를 향해 화해하고 용서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가? 사랑보다 어려운 것이 용서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만큼이나 어렵다. 용서하지 못하니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용서를 더 잘할 것이라 기대한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독촉하고 종용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자기 손과 발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기에게 돌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으니 기독교인들은 이런 '신적 용서'의 모범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 용서라는 로망
주기도문에는 특별한 용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눅11:4) 그런데 순서가 이상하다. 하나님 나를 용서하니 나도 용서하는 힘을 갖게 해 달라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먼저 용서하지 않는 한, 나는 감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겠다는 말인가? 마태는 이 용서의 기도를 중요히 여겨 주기도문 끝에 주석을 달았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강력한 조건부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절을 조건부로 해석하여 왔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비율에 따라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니 신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를 상호관계로 본 것이다. 그래서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주기도문을 드릴 자격도 없다고 이해해 왔다. 종교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신앙의 길이 버겁다.. 예수의 죽음이 인간 죄에 대한 신의 용서라면 용서가 그 죽음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용서를 당위로 요청받는 신자들의 현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현실이기에 버겁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경우들, 아니 잘못했다는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신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에 종속된다는 말인가? 정말 용서하지 않으면 신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가? 그런 용서를 실천하지 못할 때마다 우리들은 죄책감을 느껴야 하나?
예수의 용서는 신앙적 로망이고 스데반의 용서는 도덕적 이상이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 '신적 용서'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우리에게는 너무 크다. 이 깊은 괴리,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과 죄책감에서 벗어나 용서의 삶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성경의 용서는 올무가 아니다. 주기도문의 앞뒤 맥락을 보아도 더욱 그러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 방법을 가르쳐준 동기가 따로 있었다. 즉,.즉, 외식하는 자들의 위선적인 구제와 기도, 금식 생활을 비판하고자 주기도문을 알려준 것이다. 용서도 이 맥락 안에 있으니 용서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겉치레가 아니라 진정성리라는 말이디, 더 중요한 것은 가해자가 먼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끼친 패악질의 용서를 구하라 하였다.
2. 용서에 앞서
구약 제사 중에 속건제가 있다.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그것의 120%를 갚으라는 것,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순서'이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피해자를 찾아가 보상 혹은 배상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120%의 보상은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자매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수의 말씀은 정확하게 이 속건제 정신을 반영한 지적이었다. 해를 끼친 이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피해자는 심한 고통에 빠진다. 가깝고도 먼 어떤 나라처럼, 어떤 권력자의 뻔뻔한 자기 합리화처럼, 더 나아가 <미량>이라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 이야기처럼 말이다.
예수는 주기도문에서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선행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런 후에 피해자에게 '네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라' 하셨다.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용서받는 자의 회개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 이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베드로가 물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렇게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 하였다. 이는 490번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무한정'의 용서를 가리킨다.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음에도 작음 빚을 용서하지 않았던 '악한 종' 비유를 들려준 예수,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도 우리에게 그같이 한다는 것,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언급도 앞뒤 맥락에서 다시 읽어야 오해가 없다. 베드로가 용서 햇수를 묻기 직전에 예수는 혹 형제 가운데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네 단계로 설명한 바 있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마18:15~17) 첫 단계는 직접 권고였고 두 번째 단계는 증인을 대동한 권고였다. 세 번째 단계는 교회에 일러 공적으로 치리 하는 것, 하지만 이렇게 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네 번째 단계로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즉 관계를 끊으라 하셨다. 피해를 입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결코 예수는 용서를 이상화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용서의 길을 보여주었다.
3. 자신에 대한 용서로
용서는 피해자의 언어이다.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이고 주체적인 선언이니 가해자의 태도에 달린 일이 아니라 피해자의 능동적 결단에 달린 사안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예수나 스데반처럼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에서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너무 많이 용서한다. 하지만 그 같은 섣부른 용서는 가해자에게도 좋지 않다. 어설픈 용서는 손상된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에 도리어 방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17:3~4) ‘일곱 번’은 무제한의 용서를 의미한다. 그러니 끝없는 용서,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하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히 ‘회개하거든'이라는 전제를 붙여서 '용서하라’고 말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한다 해서 자신을 미워하거나 자책하거나 강박에 삐지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또한 그런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업적도 아니다. 혹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용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인가? 다행히도 이전까지 하나님의 특권으로만 여겨지던 용서를 예수는 당신의 주기도문에서 인간이 이 땅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권능으로 바꿔주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막2:7) 실제로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어왔다.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특권이라 믿어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한 중풍병자를 고치면서 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2)라고 선포하셨다. 이를 심대한 신성모독이라 여겨 험담으로 주절거리는 이들에게 예수는 더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마9:6) 이에 바리새인들 외에 현장에 있던 이들이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전까지 용서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즉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신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 권능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로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끌었다. 용서는 내게 상처 준 이에게 넘어간 내 삶의 통제권에서 나를 해방시키고 과거의 상황이 나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도록 이끄는 현존적 힘이다. 결국 용서는 내 삶과 행복을 나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다.
결론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무엇인가? 두 사람은 똑같이 스승 예수를 배반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답게 교회의 반석이 되었지만 유다는 스스로 나무에 목매달아 죽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에 대한 용서였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후에 통곡으로 회개하여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다. 그 용서를 바탕으로 사도로서의 새 삶을 살았다. 하지만 유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스승 판 돈을 취하지 않았다. 그 은전 30량을 제사장들에게 내던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는 못했다. 용서하지 못하기에 자신에게 치솟는 미움과 분노가 그의 영혼을 말려 죽였다. 용서는 상처받은 나의 존엄과 행복, 그리고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준 능력이자 권리였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빼앗은 것이나 늑봉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얻은 유실물이나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올 것이요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얻으리라." (레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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