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26. 18:0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출4:22~23)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서 기도할 때 자기들 신의 이름을 부른다. 알라 신이든, 성황당 신이든, 심지어 사찰 입구문의 사천성왕님이든, 그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은 빌고 달래어 기도한다. 자기 집안일이나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혹은 이미 닥친 재난을 속히 거두어 달라고 빌고 또 빈다. 동양의 신이든 서양의 신이든 그 신이 그럴만한 힘이 있다고 믿기에 그 크고 두려운 분에게 기도하고 또 염원하는 것이다.
1. 아빠 아버지
어느 날 제자들이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기에 예수가 알려주었다는 주기도문, 그런데 그 기도문 시작에서 대상인 하나님을 일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하였다. 예수가 일러 준 여기 '아버지'는 헬라어로 ‘파테르’인데 우리 말로는 ‘아빠’라는 말이다.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예수 전후의 유대 어떤 문헌에도 하나님에게 ‘파테르' 즉 '아빠‘라고 기록된 곳은 없다고 한다. 물론 구약 여러 곳에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표현한 곳은 몇 곳 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여기서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표현되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도 있다.“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64:8)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의 의미가 부모와 자식 관계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창조자, 구원자의 뜻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의 입으로 ‘아빠’라는 말이 나왔다. 이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던 우리말 ‘아빠’와 같은 단어로서 혈육적으로 하나인 친아버지와 친자식 사이에서만 쓰이는 단어였다. 물론, 유대인들도 아버지라는 말을 창조주요 구원자로서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렇듯 ‘아빠’ 라는 말은 예수가 처음으로, 그리고 그 혼자서만 쓰던 말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로서 그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단어였다. 인간관계로 설명하면 혈육적 관계에서만 쓸 그 친근한 단어를 예수와 하나님 관계에서 응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 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라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 예수의 그 독생자 되심에 동참하게 됨을 선포하는 의미하는 엄청난 사건이다. 즉 우리가 예수처럼 하나님의 친아들, 친딸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기도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격적 관계가 전제되지 않고는 기도가 시작될 수 없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가 다른 종교에서의 기도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아빠’로 시작하는 것이다.
2. 그 엄청난 사랑의 관계
그러니 기독교의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에서 피조물의 필요로 생긴 것이 아니다. 창세전에 이미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 기도였다.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습관적으로, 그것도 반복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심은 당신이 인간의 몸으로 왔기에 나약하여 전능자에게 기도했던 것도 아니었다. 창세전부터 그 아버지 하나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에게 있어 기도란 예수를 떠나서 설명될 수가 없다. 구약에는 기도에 관해 설명들이 없다. 어떻게 기도하라고 기도의 방법이 제시된 곳도 없다. 즉, 영원부터 기도하셨던 예수가 와서 가르쳐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 인간들이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기도해 왔다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부모와 자녀라는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다. 이 전제가 없는 기도는 있을 수도 없고 한다한들도 혼자서 하는 넋두리이거나 일방적인 선포에 불과하다. 그 애틋한 사랑의 관계가 먼저 확인되지 않으면 기도는 출발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신이나 그 십자가 위에서 왜 그렇게 힘들어하셨던가? 40일 금식을 하고도 끄떡도 없었던 예수였었다. 그런데 그 기개는 어디로 가고 그렇게 힘들어했던가? 그 사랑하는 관계,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런 관계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서로 고통에서 등을 돌려야만 했기에 그토록 힘겨워했다. 하나님이 등을 돌리고 저주를 해야만 했던 죄, 그가 우리의 죄가 되어 그렇게 하나님과 처음으로 떨어지셔야만 했던 것이다.
그 사랑을 우리는 정말 아는가? 그 사랑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문, 그 기도를 하고자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하는 순간, 우리는 하늘 하나님의 그 놀라운 축복과 우리 신분에 대한 확신으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느끼게 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 되는 것이다. 하늘의 그 우리 아버지는 예수를 사랑하신 그 동일한 사랑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 힘겨운 중에, 외로운 중에 당신 이름을 부르는 나를 사랑의 눈으로 보고 있다. 이 엄청난 하늘의 기도를 당장의 필요에 소리 질러 외쳐대는 저 이상하고 저급한 사람들의 기도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3. 너와 나의 아버지 하나님
예수는 그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에서의 기도라는 것이 나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말한다. 우리가 누구인가? 교회를 말한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에는 약속 공동체인 교회의 소망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을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한 예를 예수는 한밤중에 떡을 빌리고자 찾아온 친구 이야기를 비유로 들었다. 이 비유 이야기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마다 성경을 자기 읽고 싶은 대로 읽고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 이야기는 유대인들 관습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5-13)
이 비유는 열심히 강청하면 하나님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대 사회에서 친구 관계는 일반 문화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그들의 친구 사이라 함은 한 밤중이든 새벽 두 세 시든 간에 친구가 요청하면 무엇이든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는 관계이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친구 관계인 것이다. 밤에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내 친구가 여행 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러니 떡 세 덩이만 빌리자” 한다. 그랬더니 집 주인이 “밤이 너무 늦었다”면서 친구의 청을 거절한다. 이야기의 초점은 유대인들의 친구 관계를 감안할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반어법이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친구가 요청하면 당연히 일어나서 줘야 한다. 그런데 혹 친구 사이임에도 그 청을 거절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을지언정 너희와 나는 부자지간인데 자녀로서의 너희 요구를 내가 왜 듣지 않겠느냐는 그 당연함을 강조함이 이 비유의 메시지이다.
결론
그 부자지간이 확인된 사람은 무엇이든 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린다 하였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라는 말인가? 영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함에 ‘아빠’하고 영적인 그분을 부른다. 어느 인류학자는 죽음이 두려워서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고 내일이 불안해서 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이 땅의 수많은 종교들, 그 종교들에서 모셔지는 신들이 인간사 길흉화복을 좌지우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 신을 복채로 달래고 때로는 40일 금식으로 엄포를 놓기도 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 대상인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관계의 아버지이시다. 기도는 자녀인 우리와와 아버지인 그 하나님과의 대화인 것이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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