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소망

2023. 1. 4. 17:0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4-13)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기 기독교 당시 로마는 유럽의 중심이었다. 그 로마에 교회가 탄생하였다. 바울이 설립한 교회가 아니었다. 바울은 그때까지 로마에 가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일이 처리되면 로마를 방문할 예정이었고 그 뒤로 스페인까지 갈 작정이었다. 로마교회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로마로 이주해 오면서 생겨난 공동체였다. 이후 이방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지면서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하였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로마 방문에 앞서 자기 신학적 입장과 선교 계획을 밝히려 썼던 것이다.

 

1. 소망과 희망

분명 로마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믿음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었다. 어떤 사람은 채식만, 어떤 사람은 육식까지도 먹었다. 당시의 육류 대부분은 이교 신전에 드려졌던 음식들이 시장에 나와 유통되었었다. 믿음 좋은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먹었지만 믿음 약한 사람들에게는 이방 신전을 거쳐 나온 그 고기들을 꺼림칙해하였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바울의 말인데, 요즘 말로 하면 술 마시는 신자와 마시지 않는 신자의 갈등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이 문제로 심각하였다. 공동체가 위태로울 정도였던 것이다. 먹거리 문제로 서로 상처를 줄 만큼 대립함은 지적 수준이 낮은 탓도 있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당시의 지적 한계였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가 충고 정도로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충고 정도로는 잠시 봉합될 수는 있겠지만 그 갈등은 다시 불거질 것이라 보았다. 바울은 차제에 이런 점과 관련한 근본적 문제와 연결하여 풀려하였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여기 전에 기록된 바는 당시까지 신약이 없었으니 구약의 말씀이다. 즉 구약의 영적 교훈인 소망과 연결시킨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고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있고 그 소망으로 기독교인이 기독교인답게 살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이 무엇인가? 일반 사람들도 희망을 말하는데 소망은 그 희망과 다른 것인가? 모든 일이 잘 되기를,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기를, 새 직장에서 잘 적응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심지어 '복권에 당첨되기를 희망한다.' 살면서 바라는 이런 것들은 누구나 당연한 바라는 것들이고 인사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그런 희망과 다르다. 그것은 구원론적 바람이다. 사람들은 구원을 사후 천국과 관련해서만 생각하나 솔직히 그것은 죽어봐야 알 일이기에 지금을 사는 우리의 기독교적 삶은 이 소망으로 규정된다. 바울은 그 메시아적 소망으로 신자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 해결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가 표현한 열방은 여러 나라’로서  본래는 이방인들을 지칭하였다.

 

2.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인용구절에 따르면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 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원수였다. 늘 약소민으로 당해왔던 유대인들이었기에 그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는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엄청났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려고 이방인을 만드셨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적대적 사상이 유대인들에게 상수였다. 바울이 인용한  “이새 줄기에서 싹이 돋아 이방인들을 다스릴 분이 나타나리니 이방인들은 그분에게 희망을 걸리라.” (사11:10) 이 구절의 이새는 다윗 아버지이새 줄기는 다윗의 가문이다. 다윗 가문에서 나신 메시아를 통해서 이제 이방인들도 희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바로 그 희망이 로마교회 교인들에게도 차고 넘치기를 원하였다. 이런 소망만이 그들 공동체를 깨뜨릴 위험에서 그 갈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사11:1-10의 선포에는 메시아사상이 짙다. 그 메시아는 심판자이었다. 그 심판자는 드러나는 모습이나 소문으로 심판하지 않는다. 사람들 생각을 넘는 새 기준으로 심판하는데 이사야가 그런 세상을 묘사하기를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이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하였다. 모든 적대적인 일들이 해체되는 세상, 그 메시아가 오면 사람들이 칼을 쳐서 쟁기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될 것이라는 예언적 상상력이 은혜였던 것이다.

 

예언자 이사야 당시는 중근동의 패권을 휘어잡은 대제국 앗수르의 패권시대였다. 그런 대제국 앞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상황에서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희망을 선포하였다. 그 선포는 궁극적 평화, 진짜 안식에 대한 외침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식으로나 오늘의 상식으로도 불가능한 외침이었다. 포식자인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양이나 염소와 함께 평화롭게 지낸다니? 물론 앗수르가 뒷날, 바벨론에게 망하였다. 그러나 말해 없어질 때까지도 스스로 작은 나라와 평화롭게 지내지는 못했다. 사자가 배고프면 양을 잡아먹는다. 그것이 상식인 세상이다.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침탈하고 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을 지배한다.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진행된다.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서 언제든 약한 나라와 약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것, 그것이 세상의 상식인 것이다.

 

3. 정글에서 소망 품기

인간 세상은 서로 실력 대결을 한다. 때로 헐뜯고 모함하며 배운 사람은 배운 방식대로, 무지한 사람은 무지한 방식으로 서로 간 다툰다. 심지어 친구까리, 가족끼리도 싸운다. 그러나 예언자가 꿈꾸던 나라, 하늘의 사람들이 소망하는 세상은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가, 모든 사람, 모든 생명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세상이다. 그럴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은 현실을 살면서도 예언자들은 그런 때가 반드시 온다고 믿어 선포하였다. 그런 궁극적 평화를 실현할 메시아가 이새의 줄기에서 올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선포자의 시대에 오지 않았다. 이사야가 살아있을 당시나 그가 죽을 때까지도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메시아 소망은 초기 기독교인들에 의해 예수가 이새 줄기에서 온 메시아, 그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믿게 하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평화의 왕이었다. 그를 통해서만 모든 적대 관계가 해체될 수 있음을 믿었다. 누가는 그런 예수의 탄생에 관한 목자 전승을 전하면서 당시의 천군 천사의 노래를 이렇게 전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메시아로 온 아기 예수를 통해서 평화가 시작되었으며 그 평화가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갈등이 불가피한 삶에게 소망의 하나님을 안다면 다툼과 갈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자도 배가 부르면 옆에 토끼가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는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들은 동물과 달리 배가 불러도 싸우는가?

 

인간은 동물보다 더 문제가 많은 존재이니 성경은 그것을 죄라 하였다. 인간의 평화는 육체의 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 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영적인 만족, 영적 풍요가 채워져야 한다. 이런 것들은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영적 만족을 경험했다. 죄와 죽음의 문제,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만족, 궁극적인 배부름을 얻은 신분들이다. 그러니 다른 이들과 다퉈야 할 이유가 없다. 이미 배부르기에 더 먹겠다고 싸우지 않는다. 이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삶에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죄와 죽음의 극복이라는 말에 실감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어느 순간 느껴지다가도 세상살이에 파묻히면 잊어버린다.

 

결론

우리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에 살고 있다. 중간기의 특징은 불안이다. 그러기에 절대 평화를 가리키는 메시아 희망을 모호하게 느낀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혼란스럽다. 혼란스러우니 내 삶이 못마땅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반은 포기한 채 낙담으로 살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오락가락하며 산다. 우리 모두가 나름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에게 이것보다 더 귀한 경험은 없고 이것 이외에 더 필요한 것도 없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사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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