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기도

2023. 1. 9. 22:51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눅11:1~4

 

어느 교외의 한적한 마을, 경건한 주민들이 사는 곳 한 한가운데 나이트클럽이 생겨나더니 젊은이들이 밤이면 차를 몰고 오고 취객들 또한 늘어나 마을은 이내 시끄럽고 지저분해져 갔다. 보다 못한 마을 주민들이 교회에서 모여 매일같이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 나이트글럽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어느 비 오는 날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나이트클럽에 떨어져 화재로 클럽이 몽땅 불타버렸다. 클럽 사장은 마을 주민들이 클럽에 대한 악감정을 갖고 기도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교회를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당신들이 망하라고 기도해서 망했으니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법원에 출두한 교회 대표 목사가 말했다. "세상에! 개가 웃을 일이요. 어떻게 기도한다고 기도한 대로 된단 말이오?" 기도의 능력을 믿고 소송한 클럽 사장과 기도의 능력을 부인하는 교회 목사,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도대체 기도란 무엇인가?

 

1. 바람으로의 기도

<내가 품고 있는 가장 간절함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간절한 소원이 나를 정의하고 나의 기도가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는 곧 내가 어떤 신앙인인가를 정의하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가슴 깊은 소원이 기도로 나타나고 그 기도가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 준다. 우리는 그 기도 내용에 들어 있는 것들을 소원으로 살아야 하고 그런 소원을 가지고 사는 이들로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기도문을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깊은 소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소원을 발견하고 또 그 소원을 우리의 기도로 만듦으로써 하나님 당신의 소원과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기대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소원하게 만드셔서 우리로 당신의 계획대로 만들어 가심을 주기도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께 몰려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시편의 내용들이 실상 모두 기도문이었다. 예수 당시만 해도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하곤 했었다. ‘카디쉬라는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 왔고 외우도록 해 왔기에 이미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외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 기도문들은 매일 두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많이 하며 시편의 기도를 줄줄 외며 따라 하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2. 시내산 율법과 신약의 산상수훈

그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 당시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앞서서 먼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여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동시에 퍼져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부흥 운동이 유대인들 안에서 많이 일어났고 단체들도 여럿 생겼었다. 바리새인들의 바리새 운동,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에센파도 그중 하나였으며 세례요한 또한 회개와 심판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을 했었다. 각자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던 것이다.

 

세례 요한도 기도문을 만들었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었다.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함도 이것이었다. 기도 방법이나 기도 정의를 물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하나의 부흥운동을 이끌어 가는 무리가 되었으니 우리의 슬로건은 뭡니까?’ 아니, 쉬운 말로 당신이 추구하는 바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6장의 주기도문을 산상수훈의 일부로 나열하고 있다. 마태는 1장의 예수 족보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를 설명하였고 2장에서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쫓겨갔다가 다시 애굽에서 나오시는 장면, 3장에서 예수가 세례를 받고 3장 후반부터 4장에서는 그가 광야의 시험을 받는다. 그리고 산 위에 올라서 산상수훈을 한다. 이렇듯 예수의 생애 전개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일하게 전개하였다.

 

그래서 굳이 예수가 애굽에서 나온 지 30년이 지난 후의 사건인 세례를 그가 애굽에서 나온 사건 바로 뒤에 붙여서 기술하였다. 그렇다면 이런 이스라엘 역사 중에 산상수훈은 어느 지점쯤일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 지켜야 할 율법들을 광야 시내산에서  받았었다. 그런 것처럼 예수가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천국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들을 산상수훈을 통해 들려주는 장면, 그 신약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시내산이었다. 구약의 출애굽이 어떻게 끝나던가? 그것이 신명기 27장 내용이다. 이 부분은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 맺는 클라이맥스이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서서 레위인들이 열두 가지 언약을 이야기하면 아멘, 아멘 해야 하는데 모두 이러저러한 경우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으로 끝난다.

 

3. 주의 기도문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천국 백성과 하나님이 맺는 언약은 복이 있나니'라고 하였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원문 성경으로 다시 읽으면 '복이 있나니'라는 이 어구는 말미의 서술이 아니라 서두의 선언문인 복이 있도다로 시작된다. 율법 아래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죄 지으면 저주 받는다’로 끝이 나지만 이제 신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즉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율법은 예수의 완전한 순종으로 주어지는 복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게다가 구약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라는 장면까지 있다.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31:19)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불순종했는지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 부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외워 불렀는데 실상 그 노래는 자기들의 불순종을 증거 하는 노래였다. 그런 구약의 모세 노래와 대조적으로 신약에서 예수가 동일하게 우리에게 외워 부르라는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의 대조점과 연속성을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된 민족인가를 외워서 불러야 했고 신약에서는 영적 출애굽을 한 우리들이 자신들을 저주의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불러야 할 노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었던 것이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 이 땅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가 모두 들어 있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의 보고이다.

 

그렇게 주어진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그 뒤에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붙는데 정리하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이 임하옵시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7)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일곱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숫자요 완전수이다. 즉, 예수가 주신 기도문이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는 완전한 기도이라는 의미이다. 주기도문만 정확하게 읽어도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 주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 제목 중 세 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기도이고 네 개는 우리에 대한 기도이다.

 

결론

오늘의 우리는 어떤 자세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혹 구약적 사고로 하나님을 인식하여 두려워서 기도하는가? 아니면 저주라는 후한이 꺼림칙하여 기도하는가? 혹시라도 하늘의 감사가 아닌, 나의 현세적 성취와 기복의 바람으로 기도하지는 않는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그렇게 하라 한 기도의 의미를 정말 제대로 알고 기도하는가? 더 깊은 묵상, 더 깊은 말씀과의 만남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형편없는 기도, 방향이 잘못된 기도를 바로 잡아 주시리라.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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