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4. 18:1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0-14)
천자문은 한자를 처음 배우는 사람을 위한 교재이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르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이다. 고 이어령 박사의 인생 첫 질문은 '검을 현이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무렵, 한문을 가르치는 훈장님께 소년 이어령은 질문했다. "훈장님, 왜 하늘이 검나요? 제가 보기엔 파란데요?" 당돌한 질문에 당황한 훈장님, 답변 대신 호통을 쳤고 그길로 소년 이어령은 서당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분명 하늘은 파랗게 보이는데 왜 검다고 할까' 이 물음은 이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40대가 되어서야 풀렸다고 한다. 주역과 음양오행 사상을 통해 검을 '흑'자가 물리적인 검은색이라면, 검을 '현'은 추상적인 검은색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안 것이다. 그래서 남쪽이 생명을 상징하는 '양'이라면 북쪽은 남쪽과 대비해 생명이 죽은 곳이라고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에 묻힌다' 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즉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고 선인들이 말해 왔던 것이다.
1. 희미함에서 확연함으로
그런데 검을 '현'에는 '가물가물하다'라는 뜻도 있다. 조금 멀리 있는 사람이나 물건이 희미하여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듯 않는 듯한 것이 가물가물, 즉 '현'이다. 한문 ‘현‘은 누에고치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형상이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누에고치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조금씩 움직인다. 고치 안에 있는 누에가 미세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누에고치는 그 가물가물한 시간, 즉 '현(玄)의 시간'을 넘어야 비로소 나방으로 탄생한다. 경계를 넘어 새 존재로 거듭나려면 '현(玄)의 시간'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도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 (고전13:13) 신앙은 '현(玄)의 시간'을 넘어서는 용기이다. 그 넘어섬에서 옛것은 없어지고 새것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늘 주저했다. 늘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렸다. 그들이 출애굽 하여 홍해 앞에 장막을 쳤을 때의 일이다. 바로가 마음이 변하여 육백 대의 병거와 정예군을 동원하여 뒤따라와 진격하기 직전이었다. 이스라엘은 너무 무서워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모세에게 대들었다. "이집트에는 묻힐 데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끌어내어 여기에서 죽이려는 것이냐?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이렇게 만드느냐? 우리가 이럴 줄 알고 이집트에서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하지 않더냐?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편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 (출14:11-12) 격한 저항이었다. 그런 그들을 모세는 달래며 말하였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3-14)
하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뒤돌아보았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목격하고도, 자기들을 쫓아온 애급의 군사들이 모조리 바다 속으로 수장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도 그들은 그 광야에서 애굽을 뒤돌아보고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3) 광야생활에 지쳤을 터, 힘든 마음이 이해된다. 너무 고달프면 불평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다 견딜 수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러나 자유와 해방의 땅, 소망의 땅,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 힘들다고 과거 노예살이를 미화함은 지나치다. 아무리 힘들기로 압제자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함은 자유자가 아니라 여전히 노예근성에 절어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2. 분명한 신앙으로
파라오의 노예가 아니라 '신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내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 이렇듯 쉽지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겨 하늘에서 비 같은 양식을 내려 주었던 것처럼 부족한 우리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신다. 자격 없는 그들이지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풍족히 거두게 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욱 다가와 외쳤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막1:15) 예수의 선포였다. 어느 날, 그 예수가 많은 무리들과 길을 갈 때 어떤 사람이 무턱대고 다가와 소리쳤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는 그를 즉흥적 열정은 있었으나 사려가 깊지 못한 사람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부드럽게 그에게 말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십자가의 삶, 신앙의 길이 얼마나 좁고 험한 삶인지 감당하겠느냐는 말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가 먼저 "너는 나를 따르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소서"라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예수가 다시 말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다소 일방적이고 무자비하기까지 한 말이다. 당시 친족의 장례는 거룩한 의무였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아버지 장례 문제였다. 하지만 예수는 그 사람 말의 속뜻을 간파하였다. 그의 진의는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나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의 부친은 아직 정정했을 터, 그런 그에게 한 예수의 이 말은 하나님 나라의 초대 앞에 핑계치 말라는 단호한 경고였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람이 언급된다.
그는 예수에게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런 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구절은 엘리야가 제자 엘리사를 부를 당시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나선 엘리사가 막상 엘리야의 승낙 앞에 "나로 내 부모와 입 맞추게 하소서"라고 요청하였었다. 이별의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엘리야는 그것을 허락하였다(왕상 19장).(왕상19장). 그러나 예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단호하기까지 하였다. 사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없다. 누구라도 밭을 가는 사람은 앞의 소나 말이 이끄는 쟁기를 바라보고 집중해야 한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이랑을 곧게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3. 하나님께 열린 길
아닌 줄 알면서, 불가능한 줄을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인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과거에 침전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기 많다. 하나님 나라는 후퇴가 아니라 전진이다. 예수는 이 세 번째의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든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인 듯 아닌 듯한 그의 미적지근한 태도를 꾸짖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근거를 얻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살 길이요 그 휘장은 그의 육체였다.성경의 히브리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나 옛 유대교 신앙으로 되돌아가려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래서 편지의 이름도'히브리서', 곧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 편지가 쓰일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여 매년 속죄 제사가 드려지고 있던 시기였다.
거대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려지는 대규모의 희생 제사는 히브리인들에게 자부심이었고 그들의 삶과 신앙의 전부였다. 그런 '성전 중심의 세계'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십자가 속죄를 믿고 살아가던 히브리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이 흔들리는 자들이 생겨났다.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사와 성전 중심 신앙체계로 회귀하려는 유혹이 생겨났던 것이다. 마치 옛날 '출애굽' 한 조상들이 광야에서 애굽을 그리워하며 '환애굽'을 외치던 그때처럼 말이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그 광야에서 다 쓰러져 죽었던 사건을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예수가 더 이상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구원에 이르는 길 열었음을 강조한다. 자기 몸을 찢은 십자가 위에서 ‘한 영원한 제사’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 예수가 자신을 드림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소 휘장을 찢었다. 그리고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생명의 길을 열었다고 선포하였다. 우리가 그런 믿음의 길에 들어선 시간은 누에고치가 나방으로 변하는 '현(玄)의 시간'이다. 고통의 길을 걸어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찢어 우리에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생명 길을 연 예수가 우리를 그 길로 부른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앞으로 나오라고 말이다. 홍해 앞에서 쫓아오는 이집트의 정예군 앞에 공포에 빠졌던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외쳤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제 2023년 새해 첫날이요 첫 주일이다. 올 한 해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 보자.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5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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