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4. 20:2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1~8)
1. 인생과 구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를 모아 놓은 책 <난중일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시가 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통영에는 지금도 이순신 장군이 이 시를 읊던 제승당이 있다. 달이 밝아 남해가 내려다보이는 수루에 앉아 깊은 시름에 잠겼던 장군 이순신, 그 적막한 바다를 가로질러 한줄기 피리 소리가 들리니 거기서 그는 애가 끊어지는 서정에 빠졌다. 대체 그의 애를 끊을 정도의 깊은 시름이 무엇이었을까? 전쟁으로 인한 근심이었을까?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은 전쟁의 분주함 덕분에 오히려 깊은 싦을 잊을 수 있었다. 그의 일기 전후를 고려컨데 한산섬에서 그의 애를 끊을 정도로 깊은 시름을 이끈 것은 인생의 출구에 대한 사색이었다. ‘나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 성찰에 대한 답답함을 그의 시에서 읽힌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매월당 김시습도 그 비슷한 시를 쓴 바 있다. ‘미친 듯이 옛사람에게 물어본다. 나는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아무도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삶이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지, 도대체 인간의 이 한평생에서 자신은 무엇을 추구하고 사는 것이 온당한 자세인지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었다. 그렇게 삶에 대하여 절절하게 고민하다가 간 우리 조상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혹,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그들도 곧 진리를 깨닫고 천국에 갔을 텐데, 그렇게 예수가 전해지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런 이들까지 지옥에 갔다면 그것은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그렇다. 매우 보편적이고 타당한 문제 제기이다.
그런데 조금 일찍 예수가 전해졌다면 과연 그들이 예수를 믿었을까?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더라면 정말 이순신도 김시습도 예수 믿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하나님은 창세전에 구원받을 당신의 사람들을 이미 정해 놓았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예수 믿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빠뜨린 것인가? 루소 같은 사람은 진리를 찾아 성경을 일백 독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시 유명한 설교자의 친구였다. 그의 설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도 하였다. 그 설교자 친구가 그토록 찾아와 개인적으로 복음을 설명했음에도 벤자민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스스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부른 인생들 외에는 예수를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도 없다.
2. 천국과 지옥
어떤 이들은 생각한다. 지옥에 안 가도 될 사람들인데 우리가 게을러서, 복음을 전하지 못했기에,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지옥에 갔다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동의할 수가 없다. 좀 심한 말 같지만 그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서 갔다. 성경의 내용과 핵심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가고 싶어서 지옥으로 간 그들의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했기에, 자신의 인생도 신처럼 살려했기에,, 내 인생 내 것이니 내 책임하에 산다고 했기에, 바로 그런 근저의 삶이 죄이다. 하나님은 그런 인생들을 예수 안에서 죽이고 당신의 통치를 기꺼이 수용하도록 새로 살려냄,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 밖의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살려한다..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할지언정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옳다 여기는 대로 하려 한다. 그런 것이 죄인들의 속성이다. 그래서 그런 이들에게 자기가 원해서 스스로 지옥에 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이들이 사는 세상이다. 대중이 주인 되고 다수결이 통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홀로 통치하고 거기 순종하는 그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인간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곳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통치, 그의 섭리가 작용하는 곳이다. 이제 우리는 천국을 공간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넘어서야 하고 물질적인 곳으로만 사유했던 것도 넘어서야 한다. 단단히 결심했음에도 영혼을 더럽히는 협잡에 약해지는 우리 욕망, 은혜 충만의 시간들을 잊고 어느새 다시 죄로 스물 거리는죄덩어리인 육체와 삶의 정황들, 이런 죄에 대한 욕구를 토해내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곳, 우리는 그곳을 소망한다. 따라서 주기도문구의 한 구절처럼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함은 그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내 삶에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에는 주제가 있기 마련인데 성경도 책이니 주제가 있다. 대주제는 예수이다. 또 다른 주제가 있다면 하나님 나라, 언약, 사랑, 구속사, 하나님의 주권, 은혜 등, 그중에서 거시적으로 다른 것들을 다 품는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 나라의 완성, 그 중심에 예수가 있기에 주제를 예수라 하고 그 나라를 완성하는 과정의 우리 역사를 구속사라 한다. 그렇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 상호 간의 사랑이 풍성한 곳이다. 그 수직적, 수평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 그 나라 사람다운 삶이기에 주제를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그 나라 완성을 당신 언약을 따라 이루어 가기에 주제를 언약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의 주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대주제 속의 부제들이니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3. 하나님의 나라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주권, 영토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주권이다.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그 주권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일본제국에서 광복을 맞았을 때 당시 신문들이 일제히 '조선이 주권을 찾았다'고 보도했었다. 그렇다면 그 주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통치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 주권이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으니 국민의 대표들인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이끈다. 그러나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주권에는 입법, 사법, 행정의 3요소가 있다. 법을 세우고 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그 법을 어겼을 때 재판으로 상벌을 가하는 것이 주권의 작용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행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처음부터 인간은 창조자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가장 행복하도록 지어진 하나님 의존적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의존 관계를 떠나 스스로 자기 인생의 통치자가 되겠다고 이탈하였다. 자기가 욕망하는 대로 살고자 했던 그 일탈에서 인간사 고통과 슬픔과 상처들이 시작된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 함은 엇나간 자리에서 다시 원래 자리로 복귀함, 그래서 내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지기를 앙망함이다. 그 하늘 왕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에 의해 건설되는 나라이다. 인간의 협력 같은 것은 소용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나라이다. 그러니 천국 시민됨에 혈통이나 성과 같은 인간의 일이 간여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될 수 있다.'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마태복음의 처음 족보에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 다윗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14대,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까지 14대라고 기록되어 있다. 굳이 14라는 숫자로 족보를 나누었다. 14는 7이 두 개다.. 그렇게 계산하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7이 여섯인 족보이다. 예수는 그 족보의 마지막이다. 즉, 여섯 번째 세대의 마지막이며 뒤이어질 일곱 번째 세대의 시작인 것이다. 완전한 안식의 숫자 7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세대가 와야 하는데 그 세대는 예수를 시작으로 하여 성령으로 난 자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족보의 의미이다. 위로부터 난 자, 거듭난 자들로 이루어진 나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나라, 이는 우리가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해야 하는 나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의 삶이 불가피하다.
결론
하늘 사람들은 세상 것들로 누리는 행복의 지수에 관심 없다.. 나의 하늘 백성 됨, 내 신실함은 세상에서의 얼마나 성공적이었나로 평가할 수 없고 또 평가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단지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얼마나 닮아가고 있는가로 평가될 뿐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인 이방인적 삶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속한 왕국은 하늘에 있으니 우리 열매는 하늘의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나라이다. 따라서 그 왕의 통치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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