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4. 15:3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성탄절 기다림의 시즌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마4:16) 예수가 탄생하자 마태는 오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이렇게 선언했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요1:9)이라 했다. 예수도 자신을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고 직접 말한 바 있다.
1. 빛과 어둠
'빛'은 메타포이다. 진리의 메타포이고 신의 메타포이다. 그렇다면 반대가 되는 '어둠'은 거짓의 메타포이고 악의 메타포이다. 밀턴은 실낙원에서 신에게 반기 들어 쫓겨난 천사들의 지옥 특징을 ‘완전한 어둠’이라 하였다. 거기서 열패감과 절망감, 그리고 신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였다고 한다. 완전한 선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를 유일한 낙으로 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이분분이나 이원론적 구분을 좋아한다. 간단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원론적 메타포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나치 정치 선동 도구에 활용되었다. 인간 세계를 빛과 어둠의 두 영역으로 갈라서 성경의 서사와 결합시켰던 것이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서 결국 빛이 어둠을 정복하여 끝날 것이라는 성경 구절들, 계시록은 최후 심판 날, 악에 대한 최종 징벌과 어둠의 완전한 소멸을 예언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과 결합하여 나치는 이분법적이고 호전적 세계관을 독일 국민들에게 주입시켰다. 1차 대전의 패배로 혹독한 배상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들, 그런 그들에게 어둠에 대항하는 빛의 투쟁이라는 성스러운 전쟁 선동에 사명감을 불어넣었다. 자신이 빛이고 우리만이 절대 선이라 주장한 나치가 집권하자 유럽에는 지옥문이 열렸다. 성경에는 빛과 어둠에 대한 이분법적 구절만 있지 않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였지만 어둠도 창조하였다. 빛과 어둠을 나누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불렀다. 그래서 시인은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시74:16)고 노래하였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 같다. 어둠도, 밤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성경에서 빛과 어둠은 적대적 이분법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이분법으로 충만하다. 안 밖, 위 아래, 높고 낮음, 서쪽과 동쪽 등 공간적인 위치 대립과 선과 악,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 삶의 경험들까지 이분법적이다.
게다가 강함과 약함, 아름다움과 추함, 성공과 실패 등 삶의 가치까지도 이분법적 구조로 익숙하다. 이 구조에서 한쪽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대개 긍정적인 쪽을 선택하고 반대쪽을 버린다. 그런데 이상하다. 선을 추구할수록 악에 대한 두려움은 강해짐은 왜일까? 성공을 추구할수록 더욱 실패를 걱정하게 됨은 또 무슨 까닭일까? 인간은 무엇을 얻으면 얻은 그것을 잃을까 염려한다. 심리학자인 융은 인간 내면의 그 어두움을 '그림자'라 불렀다. 그림자는 ‘빛의 반대’이다. 예로부터 빛은 긍정의 상징이고 그림자는 부정의 이미지였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인간은 동굴 밖의 세계를 모른 채, 동굴 안에 살기에 동굴 뒤쪽 벽면에 비치는 그림자를 진실로 믿고 산다고 하였다. 그림자는 이데아에 반대이고 허상이라는 것이었다.
2. 투사와 회피
반면, 융은 내면의 이 그림자를 버려야 할 게 아니라 대면하고 통합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림자는 절대 악이 아니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이니 인간은 누구나 이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 중 자신에게는 그런 그림자가 없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 그림자를 알지 못하거나 인정치 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편한 대로 교만이고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이다. 그런 인간들은 그것을 남에게 투사한다. 자기 열등한 부분을 남에게 투사하여 그를 비방하거나 증오하는 것이다. 나도 모를 불편하고 경멸스러운 마음, 이유 없이 싫거나 꺼려짐, 왠지 비위를 거스르는 친구 등으로 말이다.
투사는 일시적인 안도감과 해방감을 주면서 그 자신은 착한 사람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하지만 그 투사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스스로를 황폐하게 만든다. 자기 그림자를 통합하지 못한 부모는 자녀에게 그 그림자를 투사하여 야단치고 통제하려 한다. 그 결과,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악화되니 양쪽 다 불행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자기 자신과 사이가 나빠지니 타인과의 사이도 불편해진다. 그런 투사는 개인과 개인 사이만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 사이에도 발생한다. 개인에 대한 집단적 투사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들고 그에게 공동체의 어두운 그림자를 씌워 홀로 감내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집단과 집단 사이의 투사도 있다. 이런 그림자 투사의 위험을 오늘의 우리 공동체가 경험하고 있다.
고약한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해 자기 지지 집단의 단결력을 높인다. 체제 문제점을 유대인들에게 돌려 독일인의 단결을 도모했던 히틀러는 그 전형이었다. 내부의 불만과 열등감을 이웃 나라 도발로 자국민의 시선을 돌려서 자기 집단의 위기를 은패, 극복하는 수법은 가까운 나라 일본의 단골 정치기법이다.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을 정치에 이용하여 합법적 집단폭력인 전쟁을 도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그림자 투사라는 무서운 죽음의 에너지가 도사리고 있다. 한 집단의 그림자가 상대 집단에 투사되면 상대는 인간이 아닌 괴물이 된다. 아니 괴물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제거해야 할 악으로 보이니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3.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는 내 안의 어두움과 직면해야 한다. 의식이 빛이라면 무의식은 그림자이다. 그런데 무그 의식에는 열등하고 어두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림자 어둠을 직면하고 포용하면 그 안에 창조적 능력과 빛의 원천이 있다. 형용모순이지만 우리 안에는 '어두운 빛'이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억압하고 남에게 투사할 것이 아니라 그것과 화해하고 통합되어야 마음과 삶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안의 그림자를 통합하여 희망을 찾은 선지자였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으며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다.” (애3:1-3) 자신의 깊은 어둠을 고백하면서 동시에 담즙 같은 그 어둠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내 소망이 되었습니다” (애3:19-21)
힘들지만 내 어둠을 기억하고 응시함은 오히려 소망이다. 그래서 바울도 같은 말을 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책망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엡5:8, 13) 우리는 그 빛을 기다린다. 세상에 와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을 기다린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는 우리에게 낯선 진리를 보여주려 오는 분이 아니었다. 빛이신 그는 우리를 만물의 기원,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 오랜 분이었다.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그분, 그분에게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었다. 세상이 펼쳐지고 생명이 탄생할 때 그가 가장 먼저 울린 처음 말씀이 사랑이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1:1-4)
그 빛이 지금도 만물들에서 요동치고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 '너만이 너다'라는 셰익스피어의 의미 있는 표현이 있다. 다른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니 무엇보다 자신을 발견하라는 말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다”(렘1:5).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신다.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신다. 그 사랑으로 분열된 나를 찾아오신다. 나의 어둠 속으로, 내 깊은 그림자 속으로 빛과 사랑의 메시아로 오신다. 그래서 내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온전한 나로 삶의 평화를 이루어 가신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후4:6) 우리 속의 빛이신 그가 말씀하신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 보라” (눅11:35)고,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8)고 말이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3:19-23)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의 시간을 넘어 (2) | 2023.01.04 |
---|---|
성탄의 소망 (0) | 2023.01.04 |
살며 사랑하며 (1) | 2023.01.04 |
삶의 형통과 고난, 그리고 상처 (1) | 2023.01.04 |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0) | 2022.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