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2023. 1. 4. 13:5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요5:24-27)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다. 어느 시인의 독백처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에 이르렀. 달리는 차 유리 밖의 산야들이 더 짙은 흙갈색으로 변해가는 추운 계절이다. 이 차가운 시즌에 진이 빠져가는 삶을 이해하고자 침묵해 본다. 나를 들여다보기에 이 스산한 계절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왔다가는 가는 것들,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정작 자기의 사멸은 아직 멀리 있는 사건, 아니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생들, 그 많은 인생들 속에 나도 숨어 있었다. 정녕 차갑고 하얀 이 계절에 우리의 죄와 악이 투명하게 들켜서 영혼이 맑아지는 기회와 은혜가 되기를 기도해 본다.

 

1. 산다는 것의 역설

아동문학가 노리스의 말처럼 삶은 하나의 역설이다. "침묵 속에 앉아 있으려 할 때 그 많은 마음속 소음과 만나게 됨은 역설이다. 고통의 경험이 고통을 초월하게 함도 역설이다. 고요함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충만한 삶과 존재로 이끌다니,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인간은 역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사 모든 일들이 분명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그 역설로 인하여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을 경험한다. 겨울 한가운데서 이미 여름의 씨앗이 자라고 있고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며 어둠과 빛이 늘 함께 있으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맞물려 있음을 아는 존재의 더 깊은 차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그리운 이와의 이별 앞에서 우리는 존재가 무너지는 아픔을 느낀다. 삶의 역설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으로는 상실의 고통으로 무너지는 것이다.

 

그 상실감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필요하다.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그 희망을 해석하여 왔기에 그를 희망의 신학자로 부른다. 그는 히틀러에 의해 징집되었다가 영국의 전쟁 포로가 된 이후 신학의 꿈을 갖게 되었다. 이후,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이후 교수로 퇴임할 때까지 <희망의 신학>을 주창해왔던 신학자였다. 인간들은 물었다. "죽음 후에도 생명이 존재합니까?"  몰트만 박사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인간은 죽음을 절대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다음의 사실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죽어가는 과정은 느낄 수 있지만 그 죽음을 체험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체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임사 체험? 그 또한 죽음 이전의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소설가 김훈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런 대답에 인간은 또 묻는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지 않는가?” 작가는 담담히 대답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한다. 그들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생명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 그들의 죽음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생명의 기쁨을 빼앗아가며 살아가려는 의지도 빼앗아 간다. 이것이 진정한 죽음 경험이다. 인간은 직접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할 수 있다.“ 인상적인 대답이다. 그러니 인생의 문제는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인 것이다.

 

2. 죽음은 사랑의 부재

그렇다면 죽음의 반대는 생명이 아니다. 생명과 죽음은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반대는 사랑이다. 사랑의 부재, 바로 그것이 죽음인 것이다. 우리가 죽음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할 이유는 생명이 죽음보다 탁월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다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죽음보다 탁월하다. 만약 생명이 영원하다면 죽음 없이 살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생명과 불가분 관련된다. 죽음이란 생명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 죽음은 결코 생명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이 이기면 그 죽음이 더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 없는데 죽음이 어찌 존재하겠는가? 그러니 인생의 문제는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이라고 재정의해야 한다.

 

예수는 명확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시제가 현재 완료형이다.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진술하였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요일3:4) 기독교에서 인간의 문제는 '삶이냐 죽음이냐'가 아니다. 그 문제는 예수의 부활로 정리되었다. 우리의 문제는 이제 '사랑이냐 죽음이냐'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이미 예수가 그 질문을 바꾸어 버렸다. "생명을 살아 있게 만들고 그 생명에 대한 기쁨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이다. “ 사랑을 체험한 생명에 대한 기쁨에서 우리는 '생명의 충만'에 경외심을 갖는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니 영생의 본질도 결국은 사랑인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호스피스 슈이치는 대략 1000명의 죽음을 목도하고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그중에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한,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사랑이냐 죽음이야'이다. 성직자이자 작가였던 알프레드 디 수자는 말했다. "춤추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3. 인생의 위로는 하나님

아가서는 인간의 에로스를 통해 신적인 사랑을 노래한 책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아8:6~7) '사랑은 죽음같이 강한 것', 성경 어디에도 이런 표현은 여기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함께 사랑은 죽는가? 아니면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가?우리의 사멸할 생명은 영생의 약속이라는 '배아'를 선물로 품고 있다. 우리의 유한한 삶에 영생을 약속하는 씨가 심겨 있는데 그 배아가 바로 사랑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광스러운 빛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죽음은 거기로 가는 길이다. 죽음이 하나의 종말인 동시에 하나의 시작인 것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나왔다가 노을빛 함께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 하늘로 총총히 떠나는 것. 그런 믿음과 소망으로 지금을 사는 이들이 하늘의 사람들, 사랑하는 이들이다.

 

누구도 자기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의 도전이니 인생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경고한다. 사랑을 나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지금 사랑하며 살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 사랑 말하기를 꺼린다. 실천하기를 미룬다. 사랑은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이요 영생의 씨앗인데 왜 인생은 사랑을 미루는가? 왜 오늘 우리의 사랑은 절실하지 않은가? 아기 예수의 탄생,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즌이다. 이 탄생 또한 묘하게 끝과 시작이 하나로 이어지니 역설이다. 이사야 40장에는 힘든 노역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선포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는 선포였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왜 위로하는가?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요 이제 앞으로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사야가 여호와께 묻는다.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나님이 그에게 위로하여 말씀하셨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도대체 무엇이 위로의 말씀인가? 우리 인생이 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다는 그런 깨우침이 무슨 위로가 될까? 우리의 위로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이다. 인생은 유한하다.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 우리의 위로는 그 사랑,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를 찾아온다는 복음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는 것이다. 영원시간을 찾아서, 무한유한을 품은 채 사랑죽음을 삼키러 오고 있다. 하늘에 계신 그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스스로 비워 사람이 되어 온다.

 

결론

그 하나님이 와서 스스로를 낮추고 죽기까지 십자가 위에서 사랑이 무언지를 보여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여기 온 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는 것,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위로이다. 성탄절이 다가오는 시즌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삶으로 체화하기를.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사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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