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2. 21:4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창28:10-19)
1. 두렵고도 가까운 하나님
빅뱅 이론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물리학자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우주에 시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독교의 창조론을 너무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부 겸 천문학자 조르주는 중력방정식 수학의 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우주는 반드시 팽창해야 한다’는 이론을 밝혀 빅뱅 이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138억 년 전 빅뱅 초기부터 지구를 향해 달려온 빛, 그 긴 기간 동안 이 광활한 우주를 시속 10억 8천만 킬로의 속도로 달려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이다. 어떻게 그 먼 거리를 헤치고 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그 깊고 깊은 어둠에 길을 내고 그 빛이 왔다. 빛이신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어떻게, 왜 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고 따질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빛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 그 빛이 우리를 찾을 수 있도록 얼굴을 드는 것, 즉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뿐이다.. 찾아오는 그 빛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니 그럴수록 더 깨끗하고 투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함부로 가까이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발견하고 경이롭게 여겨 그 앞에 다가갔을 때였다. 하나님은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출3:5)고 했다. 히브리 노예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도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한 하나님은 모세만 가까이 오게 하였고 일반인은 올라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것을 어길 시,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고 경고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늘 가까이 있었다. 모세는 역시 이스라엘 회중에게 "여호와께 가까이 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을 들었다"(출16:9)고 하여 하나님과 가까이할 것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멀리하는 인간들에게 예언자 이사야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사29:13)라고 비판하며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 (사55:6)고 거듭 촉구하였다.
하나님은 신비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룩하고 거룩한 신비이다. 인간의 사유와 관념 너머에 계시는 존재로서 영원한 세계의 근원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계신다. 우리를 택하고 가까이 오게 하는 분이니 우리가 굳이 그 하나님을 만나려 갈 날개가 필요치 않다.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있다'고 하나님이 와서 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태초부터 우리 내면에 그 하나님이 바람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은 내일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와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와 있는 것이다.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1)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저 높은 위에 있는 신이 아니다. 내 인생과 우리 역사 한가운데 늘 있었다. 우리 존재의 밑에서 빛으로, 내 삶의 바닥에서 말씀으로 항상 함께 있었다.
2. 가까이, 조금씩 더 가까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재난 영화 <타이타닉>을 잊을 수가 없다. 침물해 가는 배의 그 아수라장 와중에 갑판 위 한 켠의 사람들이 연주한 음악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울림이 크다. 차가운 빙하의 바다로 침몰해 가는 배 위에서 살고자 허둥대는 사람들, 그런 그들을 위해 무명의 악사들이 연주했던 그 찬송가를 잊을 수가 없다. 110년전 4월의 밤에 뉴욕으로 향하던 타이타닉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였다. 신화의 거인족 Titans의 이름을 따서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라고 자부했지만 수 차례의 경고를 무시한 채 출항했다가 결국 빙산과 충돌로 차가운 북대서양에 잠겼다. 승객 2200명 중 1120명이 목숨을 잃었다. 감동적인 장면은 배가 침몰해 가는데도 선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려는 무명 악사들의 연주였다. 탈출할 생각도 않고 악사들은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을 마지막까지 연주하며 최후를 맞았다.
이 찬송가는 약 200년 전 영국 여성 시인이 그녀가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이 주일설교와 어울릴 만한 시를 써달라는 부탁에 성경을 묵상하며 쓴 시였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도망쳐 하란으로 가다가 해가 지니 돌멩이 하나 가져다 베개 삼고 잠을 잘 때 꿈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시리라 말씀하는 걸 듣고 깨어 일어나 베개 삼았던 그 돌을 가져다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은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했던 그 이야기, 시가 너무 좋아 여러 사람이 이 시에 작곡을 하였는데 가장 유명한 버전이 로웰의 작곡으로 오늘까지 익히 알려진 찬송가이다.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라는 우리말 번역은 원문 감동을 세밀하게 잡아내지 못했다. 원문은 "내 주를 가까이"가 아니라 "내 주를 더 가까이"라는 비교급이었다. 그리고 '야곱'이라고 번역된 부분도 원문은 '그 방랑자'라고 표현되어 있다. 물론 창세기 28장의 형을 속이고 살고자 도망치던 그 야곱이다. 하지만 그 야곱을 '방랑자'라 표현한 상징성과 의미가 더 크다. 방랑자는 야곱만이 아니라 탁한, 좌절한, 사는 이유를 잃은 모든 인간, 바로 우리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방랑자에게 꿈이 있었다. 그는 어두워지면 갈 곳 없어 돌멩이를 베개 삼는 노숙인 신세였었다. 그럼에도 꿈속에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자 하였다. 결국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를 보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꿈을 꾼 것이다. 이 시의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시인은 자신이 십자가에 박힌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모든 노래는 "나의 하나님, 당신께 더 가까이" 밖에 없음을 노래하였다. 사실, 신앙이란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역설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성공적이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실패가 닥치고 배가 난파함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이 끊이지 않음이 신앙인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계심을 믿는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3. 빛의 하나님에게로
오늘 우리의 상황은 침몰하는 배 타이타닉 호를 타고 있는 것 같다. 역병에 사회 참사, 전쟁과 가뭄, 빈곤과 실업, 파업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를 안전하게 구조할 구명보트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 우리 공동체를 실은 배의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지도부라는 운전자들이 훈련받지 못한 선원들 같다. 더욱이 우리가 탄 배의 규칙은 일등석 승객부터 구조하게 되어 있다. 여성과 어린이가 먼저일 것 같지만 영화에서처럼 삼등석에 탄 여성과 아이는 갑판 위에 올라올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수천 미터 깊이의 얼음 바닷물로부터 승객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타이타닉 호의 강판 두께는 10cm에 불과했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두께가 고작 10cm, 그 침몰하는 배 위에서 모두가 살겠다고 아비규환이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도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수많은 사람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찬송가를 연주하던 무명의 악사들, '주를 가까이하려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우리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가까이 나가기 원한다'는 찬송은 이 어려운 시기의 우리 고백이 되어야 한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세상을 위로하는 우리의 하늘 찬송이 되어야 한다.
최신 우주망원경 도움으로 우리는 우주의 가장 깊은 곳을 본다. 131억 년 우주의 역사에서 137억 년 전 태고의 빛까지 본다. 우주 탐구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경이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 우주는 하나님이 지은 이 광활한 천체의 극히 일부이자 찰나일 뿐이다. 여전히 우주는 어둠으로 충만하다. 빛은 빅뱅의 우주가 탄생한 후 38만년이 지나서야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주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로 충만하다. 이런 어둠이 우주 전체 물질의 96%이니 우주는 그 자체로 충만한 어둠이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1%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만큼 하나님은 영원한 신비이다. 언제나 우리의 사유와 관념 너머 세계에 있는 거룩한 신비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가까이' 계신다. 그 하나님께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모든 권위에 저항한 지성인이자 무신론자였던 고 이어령 교수, 교회를 다녀본 적도 없고 종교를 믿은 적이 없던 그가 어느 날에 세례를 받고자 무릎을 꿇었다. 인간 지성의 끝이 냉소와 회의가 아니라 깊고 겸손한 영성에 이러름을 그가 보여준 것이다.
예수 처형 이후 낙망하여 엠마오로 낙향하던 두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가까이 이르러 동행했으나 그인 줄 알지 못했다. 고 이어령 교수는 자신의 깜깜한 가슴 밤하늘 위에 언제나 별처럼 빛나고 있던 한 빛을 보았다. 그 빛이 어떻게 그에게 왔는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빛이 숨어 있는 것들을 찾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잃어버린 것, 잊어버린 것, 혹 위험에 처해 있거나 고통에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일을 좋아하는 빛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빛을 향해 몸을 돌렸고 그 빛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인간 지성 위에 비치는 영원의 빛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이 되는 분에게 여쭈었다. "하나님,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 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영원한 신비인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신다. 그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신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레10: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2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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