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4. 12:1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여러분 각자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롬8:1-2)
1. 자기 증명의 유혹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증명해서 설득력을 얻으려 한다. 특히 신자라 자칭하는 이들의 경우, 자기 믿음을 자신의 잘 풀림, 형통과 성공으로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러나 예수가 사탄에게 받았던 도발들을 보면 그것이 바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잖오, 멋지게 돌로 떡을 만들어 보이시오. 당신의 신성을 한번 보여 주오’ 등. 자신의 능력 많음을 보임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맞다면 예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당신, 하나님의 아들이잖오! 폼나게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천사들이 수종들 겁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하지 않았다.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것이 그가 걸었던 길이다. 그 길이 오늘의 신자들이 가야 할 길이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생명은 현세에서 받을 것들이기 이전에 내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신자라면 예수처럼 하나님을 삶으로 나타내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 하늘 아버지가 사망의 길로 가는 인생들의 구원에 불렀고 또 그 소명으로 사는 신분들이기 때문이다. 삶으로 자신의 거룩을 이루어 가면서 그 길에서 하나님의 구원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삶이 가능할까? 그런 삶과 자세를 처음 보이고 간 이가 예수이다.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의 형제들인 신자들은 제사장적 삶, 선지자적 삶을 살다 간 그 예수의 처세를 따르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혹, 그 삶에 그런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없다면 그 인생이 복음과 관계없는 삶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세상의 편법과 부조리에 입 다물고 편승해서 살면 고난이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신자는 인생관이나 가치관, 세계관에 있어 세속적 인간들하고는 달라야 한다.
성경은 겉의 화려함이 그의 신앙을 대변하지 않음을 증거 한다. 잘 믿는 사람은 만인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인생은 고난이나 시험에 처함이 아니다. 진짜 신앙인들은 고난을 통해 하늘 뜻을 배운다. 예수도 고난을 통해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이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당신 백성 중심으로 이끈다. 인류사, 우주경륜을 신자들의 그 나라 입성이라는 방향으로 끌어간다. 신자들의 장성한 분량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던가? 당신을 경외하는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지역 통치자의 실정이나 당시 정치인들의 부패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에게는 그곳에 당신의 사람들 열 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만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세상을 경륜한다. 그래서 그들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며 그들의 거룩을 도모한다. 그 과정에 삶의 고난과 난제들을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
2. 고난과 상처와 형통
그 고난과 시험들이 인생에게 유익이라면 그것들로 인해 받았다는 상처는 무엇인가?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내적 치유’나 유사한 상담들도 많았다. 상한 감정을 고치고 다독거리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상처가 인생에 전혀 불필요한 것일까? 지인의 학대나 무관심,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생겨난 고통과 상처들은 그 인생에 덤으로 얹힌 짐이기만 할까? 하나님이 관계하는 신자의 삶에 우연이나 우발적인 것은 없다.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준비되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신자의 거룩에 해가 되는 것은 막고 그 거룩을 만들어 감에 필요한 것은 허용한다. 그래서 신자 삶의 모든 것은 그들의 경건을 만들어 감에 필요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니 삶의 상처로 괴로워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간섭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 상처의 실체인 것이다.
인간은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에서 헤매는 존재이다. ‘만일 과거에 그 일만 없었더라면, 만일 미래에 그 일이 일어나면’ 하면서 산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 사단이 인간을 과거와 미래로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오빠 나사로의 와병으로 예수를 청했을 때, 예수는 그 소식을 듣고도 굳이 이틀을 더 지체하여 갔다. 뒤늦게 도착한 예수에게 마리아와 마르다가 원망의 말을 하였다. “주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런 것이 인간들에게는 상처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들의 시선을 현재로 돌렸다. “네가 믿기만 하면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것이 상처에 대한 해법이다. 믿음, 복음을 알면 상처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현장이 된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분명 고난이요 시험이었다. 그러나 예수로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 그 일로 많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현장을 보았다.
상처를 말하자면 요셉만 한 인생이 있을까? 어린 나이에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의 종이 되었다. 하늘의 뜻에 맞게 살고자 세상 유혹을 거절했음에도 오히려 감옥 신세였다. 믿는 하나님에게조차 버림을 받은 것 같았다. 감옥에서 두 관원장의 꿈 해몽으로 신원의 약속을 받았으나 석방되고 복직된 관원은 그 요셉을 잊었으니 인간에게도 배신을 당했다. 그런 요셉이 ‘형들이 나를 팔지만 않았으면, 그 여자가 나를 옥에 넣지만 않았으면, 술 관원장이 나를 기억했더라면’ 한 적이 없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의 선하심을 믿었다. 성경은 그런 요셉의 삶을 형통하다 하였다. 국어사전의 만사형통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를 감옥에도 넣고 섭섭한 일을 당하게 하며 형제들로부터 버림받게 한 그 모든 일이 ‘만사형통’이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원하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는 것을 만사형통이라 말하나 성경의 만사형통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신자의 신자 됨을 만들어 가는 생애의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사형통이라 한다.
3. 고통과 상처로부터의 해방
그럼에도 인간은 ‘그때 그 일만 없었으면’하고 과거에 집착한다. 하지만 그 과거와 그 고통에 집착한들 내면의 어떤 필요들이 충족되던가? 책임전가, 변명, 현재의 실패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만 남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 실패나 상처에 집착함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약하고 비겁한 자세이다. ‘내 성격이 이렇게 난폭한 것은 과거에 아버지한테 많이 맞아서 그래, 내가 이렇게 늘 우울한 것은 행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야’ 이런저런 핑곗거리는 바른 치유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죄에서 태어난 인간의 죄성 때문이지 과거 어떤 상황과 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 죄성에서 기인한 것들을 왜 다른 사람, 다른 사건들에게 뒤집어 씌우려 할까? 혹, 그렇게 과거에 집착함으로 은근히 거기서 자기로부터의 도피와 현실 도피에 필요한 근거를 찾고 싶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고의적으로 과거 상처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체로 심리학에서는 그 상처라는 것을 어떻게 다루던가? 내적 치유라 하여 그들은 분노나 열등감, 우울함, 거절감 등의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먼저 현실을 직시하게 하고 자기 상태를 인정하게 한다. '나는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이다‘ ’나는 늘 우울하다 ‘‘ 등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을 행복하고 강한 사람으로 위장하고자 한다. 그래서 위장을 위해 그런 증상들을 감추곤 하기 때문에 먼저 그 위장껍질을 벗겨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를 그렇게 만든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찾는다. 과거에 그의 분노를 일으키게 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가? 그를 열등감에 젖게 할 만한 환경이 있었는가? 그를 우울하게 만들 만한 인물이 있었는가? 그리고 세 번째로, 지금의 그 증상들이 과거 그런 인물, 그런 사건 때문이었음을 주지 시키고 그 과거 인물과 사건들에 책임을 전가를 시킨다. 그리고 당사자는 거기서 빠져나오게 한다. 사실, 비겁한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정말 그의 상처로 인한 증상들이 해결될까?
인간들이 살면서 겪는 고난과 쌓은 상처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닥친 것이다. 우리에게 없었던 것을 귀신들이 억지로 만들어다 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런 상처들은 어떻게 해결이 가능한가? 복음밖에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였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자 하는 인간의 삶은 우울하고 불행하며 파괴적이고 슬픈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우리 인간들의 죄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 때문도 아니요 그 어떤 인물 때문이 아니라 원래 우리 인간이 그런 악한 존재요 약한 인생이었다. 그런 우리 인생을 누군가 목숨 걸어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확신에서야 그 상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예수, 그가 우리의 거절감이 되었고 나의 눈물이 되었으며 내 불행과 우리의 배신감이 되어 자신을 몽땅 내주었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던 자로서의 거절감, 배신감, 슬픔, 눈물, 분노에서 해방된 인생들이 되었다.
결론
언제까지 과거에만 살 수는 없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하여 불안히 여김도 건강치 못하다. 대부분의 걱정들 90%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관한 것들이다. 지금을,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지금의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분의 손에 붙들려 있는 인생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열심히 성실히 오늘을 살자. 예수를 치료자로 삼아 해방된 인생들이니 무엇을 더 바라며 어떤 것을 더 원하랴? 그저 성실하게 살 기회가 허락된 지금이 감사할 따름이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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