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7. 14:1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지니라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 (출21:28~32)
수술과 두 번의 입원, 병원을 나설 때마다 망가진 몸값이 청구되었다. 적지 않은 액수였다. 다행히 건강보험과 사보험 덕분에 일부만 자비 부담이었다. 병원비를 수납하면서 문득 돌아가신 우리의 아버지들 생각이 났다. '이래서 병원을 포기하고 이래저래 버티다 가셨구나'. 그때는 건강보험제도도 없었고 사보험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일부 망가진 몸을 치료하는 값이 이 정도이니 온전한 목숨 값은 대체 얼마일까? 그 값이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고급진 일을 하는 사람은 그 목숩값이 수억이고 허드레 일을 하는 사람 목숩값은 고작 수천만 원이라 한다. 사람 목숨에 값이 다 다른 것이다. 보험회사에서 그렇게 산정해 놓았다고 한다.
목숨값이 그 정도일진대 영원히 사는 영생 값은 얼마일까? 육신의 목숨값이 수천, 수억이니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값은 수천억, 수조원일 수도 있다. 과연 우리에게 그만한 금액을 지불할 능력이나 있을까? 도저히 지불 불가적 상황이라면 탕감을 해 주거나 상징적인 값을 매긴 후 지불한 것으로 처리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우리 구식 군함들을 타국에 판매하는 경가 그 예이다. 6.25 전쟁 때 참전해주었던 우방국 필리핀이나 콜롬비아에 우리나라 구식 군함을 넘길 때 그 값을 10만 원으로 정하여 양도한다고 한다. 퇴역함이라지만 그 고철값만으로도 수억에 달할 것을 단돈 10만 원에 넘김은 상징인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으로 피를 흘렸던 그 나라에 꼭 주고 싶었기에 발생하는 거래였다.
우리는 예수가 자기 생명 값을 지불하고 산 존재들이다. 그 생명값이 얼마였던가?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30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출21:32) 모세 율법에서 ‘생명 값’이 은 삼십이었다. 이는 예언자들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세아가 자기 아내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얼마에 사 왔던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호3:1-2) ‘보리 한 호멜 반’의 값은 은 열다섯 개였다. 그러니 호세아가 지불한 고멜의 생명 값도 은 30개였다.
1. 하나님은 여전히 열심이시니
그 값은 신약 시대에 와서도 여전하였다. 예수 역시 은 30개에 팔렸던 것이다. 이는 출애굽기에서의 생명을 대신하는 값으로 동일하게 지불된 것이다. 죄와 악으로 죽을 우리 몸값을 예수가 대신 치렀는데 그 값이 고작 은 30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예수를 지불로 사용하셨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를 예수와 동등하게 취급하신 것이다. 바로 그런 은혜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말씀으로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 삶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때로는 인생 실패라는 징책으로 결국 당신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 인생을 향한 그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날에도 여전하시다. 그러니 우리가 그 사랑을 경험하고 그 앞에 순복 하니 하나님께 영광의 삶이 된다.
삼국지에는 제갈공명의 여러 활약상이 소개된다. 북쪽 위나라, 그리고 동쪽 오나라와 긴장관계를 이루며 항시 전투를 그칠 날이 없었는데 난데없이 남쪽의 부족들이 자꾸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제갈공명이 군데를 이끌고 그들을 치러갔는데 그때 남만의 왕이 맹획이었다. 제갈공명은 남만과의 전쟁에서 맹획을 일곱 번이나 잡았지만 일곱 번 모두 놓아주었다. 맹획을 죽이는 것이 남만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냄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요 맹획 한 사람을 죽여 봤자 제2의, 제3의 맹획이 계속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맹획이 잡혀올 때마다 이러저러한 그의 패배 변명을 다 들어주었었다. 그리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또 잡혀오면 또 다른 패배 이유를 대었고 제갈공명은 또 그를 놓아주었다. 결국 일곱 번 만에 맹획은 완전히 제갈공명에게 항복하고 나라를 들어 촉나라로 귀순하였다. 제갈공명은 맹획과 남만에게서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 맹획을 계속해서 놓아주었던 것이다.
하나님도 우리 인생을 그렇게 다루신다. 우리를 로봇처럼 강제로 항복시키지 않으신다. 끊임없이 설교로서 설득하고 기도의 응답으로서 회유도 하면서 점차적으로 우리를 당신 앞에 손들게 하신다. 그 맹렬한 사랑으로, 그리고 그 여전한 열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설득과 열심으로 점철되는 인생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고 결국 그분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창세전부터 선택하신 당신의 약속에 따라 온전한 구원을 선물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 인생은 그 앞에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싸움이다. 그러니 신앙이 깊어지는 것, 신앙이 단단해지는 것은 결국 우리를 구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아는 것에 비례한다는 말이다. 인생들이 이 사실을 놓치니 삶이 재미없고 신앙생활마저 의무적이 되어 버렸다.
2. 혼인 잔치를 기다리며
정말 하나님을 알고 사는 삶은 오늘이 감사하고 내일이 기다려지는 설렘의 연속이다. 마치 정혼한 신부의 결혼식날을 준비하는 나날들처럼 산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신부는 그 영광된 결혼식장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를 수차례 입어보고 혹 그 웨딩드레스에 잡티라도 묻지 않았나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왜? 신부에게 있어 결혼식날은 자기 인생의 최고 날이고 자신이 주인공이며 하객들과 신랑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묘사하였다. 어린양의 혼인잔치 날을 고대하며 등불과 기름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는 신부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유대인들 결혼 풍습상, 일단 정혼하면 그들은 법적인 신랑 신부이었다. 그리고는 한동안을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리는 동안 신랑은 신부 집에 지참금을 지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그것에 상응하는 노동력으로 대신해야 했다. 마침내 지참금이 완불되면 신랑은 당당히 신부 집으로 그녀를 맞으러 간다. 신부는 신랑이 데리러 올 때까지 정절로서 기다려야 했다. 이미 정혼한 몸이기에 다른 곳에 한 눈을 팔면 안 되었다. 혹, 그 기간에 신부가 정절을 잃거나 함부로 살면 그 결혼은 파혼이었다. 그렇게 신부가 정절을 잘 지키면 신랑은 신부를 맞아 자기 집으로 향하는데 이때 신랑 집에서 잔치가 벌어진다. 거의 일주일에서 이주일간의 잔치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결혼 풍습이었다. 성경에서는 이 풍경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잔치를 상징하여 곳곳에서 자주 소개된다. 그 유대인들의 혼인 풍습을 빌려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설명했던 것이다.
신라이신 예수께서 우리 몸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하셨다. 그러니 조만간 우리를 영원한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 오신다. 그런데 신부가 웨딩드레스에 오물을 묻히고 있거나 품행을 바르게 지키지 못했으면 그 예식이 제대로 성사될 수가 없다. 정말 신부 자격이 있는 사람, 신랑을 사랑하고 그 결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면 몸과 마음과 의복까지 깨끗케 하려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삶을 요구하신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14:4-5)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영광을 받은 자답게 사는 삶,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로 작정하셨다. 그러기에 우리 삶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날 때 하나님께 영광이다.
3. 값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아
그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의 영광’이었다.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여기 '은혜’라는 ‘카리토’는 눅1:28 에도 쓰였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세상 모든 여자들 중에서 마리아가 택함을 받고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을 품는 장면에서 천사는 ‘카리토’ 즉, ‘은총을 받은 자여’라고 불렀다. 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를 향해 똑같은 단어로 ‘카리토’ 즉, ‘은총을 거저 받은 자들’이라 불렀다. 하나님의 아들을 품게 된 마리아에게 주신 ‘카리토’와 우리에게 주신 ‘카리토’가 같음은 우리도 그 아들 예수를 품은 자들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마리아의 태 안에 들어가셨다. 그로 말미암아 마리아는 ‘카리토’라 불렸다. 성경은 그것을 택함 받은 자들에게 준 큰 은혜라고 한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23~35)
한 달란트는 오늘의 시가로 약 20억원이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는 그것의 일만 배이니 사람으로서는 값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반면에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그러니 백 데나리온은 대략 일일 노동자의 3개월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값으로 지불할 수 없는 어머어마한 은혜를 입었다. 그런 우리가 살면서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품지 못하고 용서치 못할 것이 무엇인가? 흠 많고 여전히 불평불만의 삶을 사는 우리 인생들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영으로 와 계신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음에 내가 보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이 은혜의 여정이 우리 사는 날 동안 계속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 하나님으로 완성될 것이다. 은 삼십의 은혜로 천국을 소유한 우리들이다. 그 감사로, 그 능력으로, 그 택함을 받은 자 다움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영생 (1) | 2022.09.08 |
---|---|
작고 더 작아지는 삶 (0) | 2022.09.08 |
그 분의 멍에와 짐 (0) | 2022.08.01 |
하비루의 삶을 잊지 말라 (0) | 2022.07.10 |
말과 말씀 (0) | 2022.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