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더 작아지는 삶

2022. 9. 8. 20:06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 보았노라“ 하시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삼상9:15~17)

 

바울이란 이름의 뜻은 작은 자이다. 신앙생활의 핵심 또한 작은 자이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작아지고 더 작아진다. 그리하여 자기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도움이라는 축복을 받아서 자기가 더 커지려고 한다. 신앙의 힘으로 신분 업그레이드를 꾀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든 않든 지위가 더 높아지든 않든 그런 것은 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누구나 더 작아지고 더 낮아지려는 사람은 없을 터, 자기가 더 커지고 높아지려 함은 신앙적 사안이 아니고 인간의 본성적 사안일 따름이다. 신앙은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작아지고 더 비우며 더욱 겸손하게 됨이다. 이런 기독교 핵심을 깨달은 인생은 그 삶으로 매일매일 정진한다. 바울은 그 핵심을 깨달았던 사람이다.

 

1. 모든 것에서 작은 자

당시 서신 형식은 서두에 발신자 이름을 먼저 표기했다. 한글성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으로 바울이름을 문장 뒤에 배치해 있지만 헬라 원문 성경 어순은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종 되어서라고 발신자 이름이 서신의 제일 첫머리에 등장한다. ‘바울이란 이름이 작은 자라는 뜻이니 서신의 수신자들은 다음과 같이 읽게 된다. ‘작은 자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종 되어서 너희에게 편지하노니이 같은 바울 서신서의 서두에 이미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기독교는 작아지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이런 자세를 패배주의’, 혹은 ‘자기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은 오해이다. 하나님의 크심, 그 큰 사랑과 은혜에 비추어, 그 은혜를 깨달은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겸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과 낮아짐, 자기 비움을 추구하지 않는 기독교는 없다. 혹 그런 것 대신에 성공과 부요, 자기 계발을 추구하는 교회나 단체가 있다면 그 집단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워 나가고 있음이니 결국 그 신자들도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편지에서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사울로 표기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 나쁜 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아마 사울 왕의 이름을 본 딴 것으로 여겨지는데 바울도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였었다.

 

사울의 뜻은 바라는 자이다. 사울이 왕이었음을 감안할 때, 바울의 어릴 적부터 가졌던 사울이란 이름이 뜻하는 바가 //성공을 추구하는 바람이 반영된 듯하다. 그의 유대식 이름은 사울이고 헬라식으로는 파우로스였다. 한글 발음상 사울-바울의 발음이 비슷하여 사울에서 바울(파우로스)로 살짝 바꾼 것 같지만 원어 사울-파우로스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그런데 그가 자기 이름을 사울로 쓰지 않고 모든 서신서에, 그것도 가장 중요한 서두 첫머리에 굳이 바울이라는 이름만 씀은 내가 지금부터 설명할 예수의 복음은 작은 자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는 말을 웅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그를 부르실 때 바울아하지 않고 ‘사울아’라고 부르신 것과 비교된다. 예수를 제대로 만나기 전에 그는 사울이었었다.

 

2. 큰 자가 되려는 인간 본성

모든 부모의 바람은 똑같다. 바울의 부모 또한 앞으로 우리 아들이 우리 베냐민 지파 출신의 왕처럼 크고 위대한 인물이 되라고 그 왕의 이름(사울)을 지어주었다. 실제로 그 역시 사울’(사울 왕처럼 위대한 이름)을 갖고 있었을 때, 스스로도 자기가 마치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고 기독도들을 잡아 가두는 일을 했었다. 그랬던 그가 예수를 경험하고 난 이후부터 스스로 자기를 결코 사울이라 하지 않고 항상 바울로 자칭하였다. 그가 핍박을 한 전과가 있었기에 나는 작은 자(바울)’, 그런 뜻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기독교 핵심을 알고 깨달아 보니 자기가 바울(작은 자)’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사울이란 이름은 바울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가졌고 또 갖고자 했던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불행한 삶을 살았고 또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런 것과 관계없이 자기 자녀가 이 되거나 왕에 준하는 어떤 힘과 권력을 갖기를 원하여 그 이름의 작명이 많았었다.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것이다. 실제로 바올도 자기 이름에 맞게 과거에 사울 왕처럼 살았었다. 자신의 육신적 능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했었다. ‘사울이란 이름의 이미지에 충실하기 위해 인간적으로 누구보다 배나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3:5~6) 

 

율법을 눈곱만큼도 어기지 않을 정도로 사울로서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그렇게 특별한 열심으로 사는 것에는 사울이라는 그의 이름도 동기부여를 하였다. 어쩌면 사울 왕이 그의 롤 모델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가르치려 드는 경향을 갖는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자기들이 너무 잘나서 항상 예수를 가르치려 들었고 그 예수의 약점을 캐려 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인간 중심적 삶의 종합이라 할 만큼 철저한 유대주의의 신봉자였다. 그것이 그에게는 큰 자의 삶이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사울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인 바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구분 못하니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사울()’쪽 방향을 추구하고 있다. 기독교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쪽이다. ‘사울 왕의 삶이 성경에서 부적격자로 판명 났음에도 오늘의 많은 이들이 사울 왕처럼 높고 유명하고 위대해지려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3. 바울처럼 산다는 것

그 기세 등등하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제자로 수학하고 로마 시민권자인 데다가 율법의 의로는 전혀 흠이 없었던 사람,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유대교 지도자가 어떻게 변했던가? 항시 핍박받아 피해 다니고 돌에 맞으며 감옥에 갇히고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공격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자 같음에도 모든 것을 가진 작은 자의 삶으로 내려갔다. 사울이었던 때의 자신에 대한 인식이 빌3:5~6이나 갈1:14이었다면 바울이었을 때의 자기 인식은 고전15:8~10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하나님을 알면 알아갈수록 자신이 작은 자’요 ‘더 작은 자’임을 인식하였다. 더 이상 자기를 대단한 자로 자랑하지 않았다. 그가 여러 편지들을 쓴 것은 자기 학식을 자랑하기 위함이나 저술, 출판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냥 편지를 쓴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바울의 신앙은 점점 더 성숙해 갔다. 그러면서 신앙은 더 깊어져 갔다. 바울은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하며 더 작아졌다. 바울의 이 겸손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자아인식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나는 큰 자(사울 왕처럼)’의 삶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사도처럼 작은 자(바울)’의 삶을 추구하는가? 진정 예수를 만나면 그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크고 놀라워 그 앞에 도덕이나 지위나 물질, 그 어떤 면으로도 자기를 높일 수 없게 된다. 그 은혜가 자기를 낮추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인생들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높이는삶을 추구하게 된다.

 

복음이 무엇인가? 십자가 은혜만 깨달으면 그것은 복음의 절반만 깨닫는 것이다. 그 앞에서 온전히 작아진 자신을 깨닫는 것, 거기까지 가야 온전한 깨달음이다. 그것을 깨닫고 경험한 인생이라야 매일의 묵상으로 작은 자의 삶을 산다. '바울'로 사는 것이다. 반면, 여전히 예수 믿어 하나님의 축복과 도움으로 나와 내 자녀가 사울 왕처럼되기를 바라는 인생들이라면 성경을 잘못 읽은 사람들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들이다.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이기를 원하거나 흉내 내는 인생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심을 모르는 것이다. 아니, 알아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해서그렇다. 은혜를 입지 못했다 함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결론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이름을 왕의 이름-사울을 쓰지 않고 작은()’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식 이름 바울을 사용하였다. ? 바울 서신서를 읽을 때마다 그 첫머리 서두에서부터(보통 1:1절)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인 겸손, 작은 자’임을 강변한 은혜를 받아보자. 그 바울이 천국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작고 더 작아지라고 웅변하고 있음을 기억하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1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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