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8. 21:2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직장인을 대상으로 어떤 사람을 '중산층'으로 볼 수 있느냐는 설문 조사를 했다. 과연 어느 정도, 어떤 계층 정도 되어야 중산층이라 할 수 있을까?. 부채 없는 30평 이상 아파트 소유, 월급여 500만 원 이상, 자동차는 2천 cc급 중형차 소유, 은행 잔고 1억원 이상, 1년에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증산층 기준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중산층으로 볼까?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는 중산층의 기준이 있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것,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을 것,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남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할 것,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등이다. 영국은 어떨까? 페어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이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인들의 중산층 기준도 있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할 것, 사회적 약자를 도울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테이블 위에는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등이다.
1. 약한 자로 강하게
한국인들의 중산층 기준은 오직 물질이고 경제였다. 하지만 서구 사회의 그 기준은 '시민의식'이었다. 유엔은 작년 7월에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공식 변경했다. 유엔이 탄생한 이래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가난과 주림에 시달리던 이 나라가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선진국일까? 오늘 우리의 경우,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했는데 정신과 문화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소위 '문화지체현상'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약자'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기독교 문명권인 프랑스와 영국과 미국의 중산층 기준에는 사회적 약자를 돕고 연대함이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이 놀라울 뿐이다. 오늘날 서구 선진국들이 세속화되었느니, 교회가 퇴락을 했느니 해도 그들 문화에는 성경의 정신과 문화가 세례로서 뿌리 박혀 있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강자를 물리치시고 약자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한다"(고전1:27-28) 이 관점이 사도 바울이 바라본 하나님이었다. 사회 약자를 긍휼히 여기고 우호적으로 돌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오늘처럼 세속화된 서구의 정신세계에 여전히 살아있음이 놀랍기만 하다. 어느 해인가, KBS '전국노래자랑' 함평군편에서 고인이 되신 송해 씨가 진행을 할 당시, 한 병원 원무과에 근무하는 39살 노총각이 무대에 나왔다. 사회자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왜 나왔냐" 라고 묻자 그는 대뜸 "장가가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사회자가 "그동안 장가가기 위해 재산은 좀 모아놓았느냐?"고 묻자 그는 "재산이 아주 많다"라고 답했다. 다시 사회자가 "재산이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묻자 그는 "밭 서른 평, 소 한 마리, 돼지 두 마리, 개 두 마리"라고 답했다. 청중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이만하면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청중을 향해 물었다. 이번엔 청중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는 현재 지닌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행복한 부자'였던 것이다.
대체로 사람은 현재 불필요해도 미래에 필요할까 싶어서 지금 불필요한 것을 더 소유하려 한다. 하지만 삶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금이 아름다운 것을 알게 되면 별이 아름답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미래에 불필요한 금을 위해 현재에 아름다운 별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노아의 소설 <빵장수 야곱>에서 빵장수 야곱은 친구의 손자인 요나에게 부자가 되는 법을 말해 주는 장면이 있다. 소년 요나가 "저는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될 거예요" 말하자 야곱은 "조금만 덜 원하면 넌 이미 부자란다"라고 말했다. 요나가 "아저씨는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이 갖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묻자 야곱은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필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 더 부자가 되는 거란다"라고 답한다. 오늘의 우리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지금 더 많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이 더 불안하고 더 가난한 것은 아닐까?
2. 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 우리의 가난은 부족함에서 오는 가난이 아니다. 더 갖기를 원함에서 오는 가난이다. 정신적 가난이요 영적 허기인 것이다. 인생의 진짜 가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소유가 풍성하면 존재도 풍성하게 된다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진짜 부자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언젠가 홍수가 났을 때 물에 빠져 거의 죽을 뻔한 농부 박씨. 냇가를 건너다 넘어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기절했는데 의식을 차리고 보니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물은 불어 점점 가슴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날은 어두워 오고 머리에서는 계속 피가 나고 정신은 아득했다. '아, 이게 바로 죽는 거구나' 그는 죽음의 공포를 실감했다. 다행히 그곳을 누군가 우연히 지나다 119에 신고하여 거의 가사 상태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 건강을 되찾아 일상으로 돌아간 그가 한 TV의 인터뷰에 응했다. 새 인생을 살게 된 각오를 말해달라는 기자에게 그는 수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젠 잘 살려고요. 다른 사람에게 해 안 끼치고 말이에요." 그에게 '잘 산다' 함은 '다른 사람에게 해 안 끼치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니 우리말의 '잘'이라는 부사는 '제대로', '바르게'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말이 '산다'와 합쳐져 '잘 산다' 하면 물질적인 것과 연관해 생각되었다. ‘그 사람 잘 사는 사람이니?’라는 물음은 '그 사람 제대로 사는 사람이니?' 라는 뜻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냐’라는 물음이 된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정신세계이다. 오래전 소크라테스는 ‘잘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모두 같은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미 선진국에 들어선 우리는 여전히 정신적, 영적인 빈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 마련이다.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사는 것이다. 동물뿐만이 아니라 풀도 생명을 먹고 산다. 인간은 동물을 잡아먹고 식물을 뽑아 먹는다. 채식주의자라 해도 생명이 생명을 먹고사는 이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채식주의자는 도망가지 못하는 것을 먹을 뿐이다. 한 식품학자가 인간이 한평생 먹는 음식의 양을 계산해보았다. 사람 일생을 100년으로 잡을 때 하루 3끼, 한 해 365일을 먹어야 하니 100년이면 모두 109,500끼를 먹는다. 1 끼니에끼니에 1kg을 먹는다면 한 사람은 한평생 109.5t의 생명을 자기 뱃속에 채운다. 엄청난 양으로서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나를 위해 희생한 엄청난 생명의 무게이다.
누군가 죽어서 나의 밥이 되었고 더 많이 죽어서 우리의 반찬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살아야’ 한다. 제대로,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남에게, 다른 생명에게 최대한 해 끼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모름지기 생명이란 자기 자신만으로 완성될 수 없도록 지음 받았다. 각 생명은 그 안에 결핍을 지니고 있기에 반드시 다른 존재로부터 채워 받아야 산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은혜로,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덕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의 수고와 노력보다 더 큰 무엇이 있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나'는 없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나'가 있다. '당신'이 없으면 '나'가 없고 '나'가 없으면 '당신'이 없다. 우리는 '나'이면서도 동시에 '너'이다. 이 세계에는 함께 얽힌 관계 속에 빚진 나만이 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생명의 관계망에서 벗어나 혼자 잘 살겠다고 다른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모른 채 욕망으로 내달리니 오늘 우리의 정신이 피폐하고 영적인 빈곤에 쳐해 있는 것이다.
3. 너와 나의 행복
한 영국인이 아프리카 아이들을 모아 줄을 세워놓고 반대편에 맛있는 사탕 한 광주리를 놓았다.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먹는 거야"라고 말한 후 달리기 시합을 시켰다. 당연히 몸집이 크거나 나이 많은 아이가 먼저 도착했다. 그런데 사탕엔 손도 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리고 약한 아이가 도착하자 아이들은 함께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신기해서 영국인이 먼저 도착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환히 웃으며 합창하듯 외쳤다. '우분투!' 남아프리카의 우분투 전통은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믿음의 말이었다. 인간의 생명은 혼자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고 '나'의 행복은 '너'의 행복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처럼 내 생명은 다른 생명과 이어져 있고 모든 생명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수많은 그림자 노동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생명에 대한 미안함, 존재에 대한 고마움, 그것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타락하고 문명은 부패한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없어서 부부간에, 부모 자식 사이에, 이웃 간에 다툼과 분쟁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 진실, 이 겸손, 이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았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이처럼 먹는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임이 틀림없다. 목숨을 연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영생이 없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떡'이 되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7:37-38)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물을 마시며 하늘 산소로 호흡하는 자가 천국을 소유하고 영생에 이른다.
풀들도 다음 해의 부활을 위해 생명의 씨앗을 만들어 낸다. 우리도 생명을 받았으니 부활의 생명을 만들어 내야 하잖겠는가.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지는데 우리는 예수의 생명을 먹고 산다. 다시는 주리지 않을 '생명의 떡'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의 강'을 먹고 사는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예수의 희생을 먹고 마신다는 말이다. 초대교회의 코리소스톰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바울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다. 무엇을 이룬 다음에 그 결과에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내일 기쁜 일이 있을까, 내년에 감사할 일이 있을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평생 행복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기쁜 일을 찾아 오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하다. 신학자 본 회퍼는 말했다. ‘인간은 감사함을 통하여 부유해질 수 있다’ 금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별의 아름다움을 잊지 말기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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