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0. 19:2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시33:1~8
전직 대통령 사저 앞에서 행하는 보수집단의 매일 집회, 그 집회에서 대형 스피커로 쏟아내는 험한 말들과 욕설들, 보고 듣노라면 인간에 대한 수치와 분노를 감출수가 없다. 잘했던 못했던 나라를 위해 5년간 수고했고 이제 자연인으로 돌아가 쉬겠다는 한 인생과 가족들에게 도대체 왜, 어쩌자고 허구한 날 저런 패악적 언어와 인신공격들을 퍼붓고 있는가? 게다가 그 집회 핵심 추동 세력들이 현수막으로 내건 성경 말씀이라니! 저 집단이 보수 기독교집단이라니! 어이가 없고 할 말이 없다.
1. 말이 칼이 되는 세상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지각하고 자신을 구성하기에 어느 철학자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언어가 비틀어지면 그의 생각이 비틀어지고 그가 사는 세상도 비틀어진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자신이 말하는 만큼 사는 것이다. 말로 상처를 주고 말로서 인격을 살해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는 일들이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국가 경영에 이르기까지 만연한 오늘이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말로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니, 사실 근거 없는 말과 험한 댓글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들은 귀는 천 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라는 말처럼, 나는 바닷가 모래 위에 글씨를 쓰듯 말하지만 듣는 사람은 쇠 철판에 새기듯 들을 때가 있다. 긴 인생에 짧은 말 한마디가 평생 고통을 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을 평생 가두는 존재의 감옥이 될 수도 있다.
어느 날 예수가 크게 분노하였다. 귀신 들려 눈멀고 말도 못 하는 사람을 데려왔길래 예수가 그를 안쓰럽게 여겨 고쳐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놀라 "이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찬탄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질투심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억지를 부렸다. 거룩한 은총의 사건을 악령의 일이라 비방하였으니 심한 모독감을 느낀 예수가 쏘아붙였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렸던지 바로 이어 더 심한 독설을 퍼부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난인데 이런 것들이 사람을 추하게 한다. 그러니 말은 그 인간의 수준이고 품격이다.
인간이 말을 하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당신을 계시하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40:8)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히4:12). 그러니 예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그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가? 진실하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삼하 22:31) 정직하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시33:4) 그 말씀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33:6). 그리고 요한은 그 말씀이 바로 예수임을 증언하였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
2.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육신이 되신 이 말씀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셨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으로서의 '말씀'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관념으로서의 '말'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동력을 일으키는 에너지이다. 인생을 바꾸고 전인적 변화를 가져오는 영적 파동인 것이다. 반면에 사람 이성 안에 머무는 말은 관념으로서의 개념일 뿐이다. 조용히 당신의 자리에 계셔도 되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말씀으로 오셨다. 그렇게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관념으로서 쓰이는 인간의 말들은 그런 힘이 없다.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의 말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수려한들 인간의 인생을 바꾸지 못하며 그의 말을 위해 순교하는 인생도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 인생을 흔들었고 그 삶에 응답있는 책임을 부여하였다. 낮은 인간의 언어로 내려온 말씀이 오늘의 우리 삶에서 인격적인 응답을 프로모션하고 계신 것이다.
그냥 계셔도 되는 분이, 홀로 계셔도 아무 문제가 없는 분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계셔도 되는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바로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한가운데로 와 십자가에서 말을 걸었다. 우리의 책임과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떤 책임과 무슨 요구였던가? 바울이 그 진의를 잘 파악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대신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그렇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목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9)
여기의 그 화목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말 걸어오심이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책임 있는 응답을 요구하였다.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신 것이다. 우리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메신저, 즉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자가 되라는 요청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평화의 말씀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시85:8).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119:50). 오래전 선지자 스가랴도 이렇게 증언하였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슥1:13)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성경은 권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 (벧전4:11)우리에게 평화와 화해와 위로의 말씀을 오시는 하나님이 우리 또한 인간의 말보다 당신의 말씀같이 하기를 요구하신다.
3. 살리는 말씀과 죽이는 말
어떤 때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무척 행복해한다.. '힘내세요, 걱정 말아요,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이런 아름다운 말들은 수백 번을 들어도 기분 좋은 말들이다. 격려하고 칭찬하며 긍정하는 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 인간의 존귀한 언어들이다. 격려의 말이 기적을 낳기도 함을 우리는 실제에서 무수히 들었고 또 경험도 하여왔다. 무심히 내뱉은 말 한마디가 때론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때론 넘어졌던 사람에게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서게도 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아름다운 말은 그냥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반드시 누군가의 가슴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 노래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마음으로 하는 말은 어느 누구의 가슴에서 영원히 보석처럼 빛날 것이다. 그러니 생각 없이, 격 없이 함부로 막말을 내뱉지 말자. 나의 쏟아내는 불평과 경멸의 말은 함께 사는 우리 공동체에 나쁜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좋은 씨앗, 선한 씨앗을 뿌려야 한다. 당장은 열매가 맺히지 않더라도 이런 씨앗에서 훗날 아름다운 열매, 선한 결과가 맺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갈6:9-10) 여기에 분명 ‘기회 있는 대로’라고 했다. 이 말은 지금 시작하라는 말이다. 한 그루 나무가 숲의 시작이다. 한 번의 악수가 영혼을 세울 수 있고 한 개의 별이 바다에서 배를 인도할 수 있으며 한 자루의 촛불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음을 우리는 역사 경험에서, 삶의 현장에서 체득한 바 있다.. 한 걸음이 모든 여행의 시작이고 한 단어가 모든 기도의 시작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말이 칼이 되어 사람을 베고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는 오늘의 세상에 SNS로 혐오와 증오와 차별의 말들이 무책임하게 난무하고 있다.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말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말이다.
성경은 악한 말을 하고 더러운 말을 옮기는 인간들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하였다."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1:10) 이런 사람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다가 악인들이 멸망 가운데서 망할 때 같이 멸망당할 것이다. 우리가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 우리 삶으로서 그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전에는 그분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었지만 이제는 긍휼을 얻는 자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의 말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우리 속에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는 나쁜 생각을 걷어내자. 미움은 미움의 대상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병들게 한다. 선하고 아름다운 말을 잃으면 인간의 존재가 무너지고 함께 사는 공동체가 오염된다. 우리에게 화해와 평화와 위로의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12: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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