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10. 22:0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칠 주를 계속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16:9~12)
‘하비루’는 그 사회에서 낮고 천한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주전 1800~1100년 사이, 중근동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용어로써 가나안을 포함한 당시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유랑 약탈자 집단’을 일컫던 말이었는데 한마디로 ‘국적이 불분명한 유랑 천민’이었다.’이었다. 히브리 민족의 기원지가 되는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 땅으로서 과거에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 수메르보다 몇백 년 앞선 문명이었다. 그 문명을 세웠던 집단 이름이 '에블라'였기에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 부른다. 이 문명을 세운 왕이 '에벨'이었다. 창10:21에는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히브리'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 어떤 이는 이집트 문자를 토대로 '하비루'라는 노예에서 왔다고 하나 다수는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 셀라의 아들인 '에벨', 그 에벨에게서 '히브리'라는 어원이 기원했다는 것이다. 그 히브리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하비루가 되어 노예적 삶을 살았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다. 아브라함과 계약으로 미리 말씀하셨고 또 그대로 되었음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을 애굽으로 보내시어서 400년 동안이나 하비루 생활을 하게 하셨을까?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종노릇 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다면 분명 특별한 뜻이 있었을 터, 그 특별한 뜻이 무엇이었을까?
1. 나처럼 되어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한 사람을 선택하여 한 민족을 만들고 그들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서 그 나라를 보고 본받아 모든 나라가 구원받게 함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선택된 최초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고 이스라엘, 즉 히브리인들은 그 후손들이었다. 이스라엘은 지상에다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온 세상에 보여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 되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려면 먼저 그들이 하나님처럼 되어야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어 하나님처럼 만드는 과정이었다. 말하자면 애굽이 하나님의 대장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하비루’인가? 왜 당시의 가장 낮은 계층이어야만 했으며 심지어 노예이어야만 했던가? 애굽의 대형 건축물 공사 현장에 동원되어 건축기술을 습득하라고? 그래서 장차 들어갈 약속의 땅 가나안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초대형 건축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라고? 아니었다. 그런 외적인 건축물이 하나님 나라의 모형은 아니었다. 낮은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낮아지고 작아져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비루들은 노예로서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처럼 된다’ 함은 낮아지고 작아져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꿈, 환상, 입신 상태로 경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초보적인 상태에서 일어난다. 죄의 속성이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매체가 꿈, 환상, 입신 등이었다. 영성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면 평시의 의식 상태로 그분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이 겸비하고 순전한 생각으로 살 때가 그 기회이다. 하나님은 낮고 작고 비천한 곳에 임하신다. 거기로 우리 마음이 내려가야 그분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의 탄생 자리가 마구간 말구유였음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면전에 초대받는 사람들이 모두 낮고 작은 소자들이었으니 예수의 말씀과 비유에는 이런 예시들이 무수히 많다. 동쪽과 서쪽이 하나이듯, 하나님에게는 극과 극이 만난다. 그래서 가장 낮은 곳에 계시기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는 패러독스가 복음으로 임하는 것이다.
2. 하비루 문화를 만들도록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도록 애굽이라는 대장간에서 낮고 작은 비천한 자로 만들어져야 했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들어 가신다. 그 하비루 생활을 하되 400년을 해야 한다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그 비참한 삶을 40년도 아닌, 400년이나 필요했을까? 100년, 아니 200년이며 족하지 않았을까? 400년이란 긴 시간은 하비루 문화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잠깐의 유행이나 한 때의 운동이 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문화는 잠시 있다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은 물론 골수에까지 스며드는 것이 문화이다. ‘종의 문화’가 뼛속까지 스미도록 필요한 기간이 400년이었다. 구약 곳곳에는 ‘너희는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말씀이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다.(신6:12, 24:22 등) 하비루 문화의 생성 여부가 이스라엘의 성패 여부, 더 나아가 세상 구원의 성패 여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구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이 가장 크게 공력을 기울인 부분이 애굽의 종살이 400년이었다. 종살이하다가 죽어간 히브리 사람만 고통당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면서 참아 오셨다. 마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특수부대에서 특수 훈련을 받으면서 다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과 같이 고통을 견디며 기다리셨다. 그 훈련을 이겨내야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선민이 되겠기에 히브리인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아픔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히브리인들이 이러한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나라마다 나름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신화들은 문자 그대로 신화일 뿐이다. 오히려 그 신화들을 크게 부풀려져서 민족적 자긍심을 유도하고 나름의 국수주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의 건국신화는 어떤가? 부끄럽게도 그들은 그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했다는 하비루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생명력은 영원한 하비루 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즘은 곧 하비루 문화이다. 그렇다고 하비루의 문화가 노예근성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습득한 것이 노예근성이었고 이 근성을 씻어내고자 광야생활을 했다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큰 의도를 왜곡시키는 관점이고 전체적 흐름을 잃게 하는 주장일 수 있다. 시내산 율법의 핵심은 ‘애굽에서 습득한 하비루 문화의 보존’이었다.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16:12) '너희가 살려거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이것이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신신당부였다는 말이다.
3. 고난으로 강인케 되니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세우려고 택한 땅은 큰 고난이 불가피한 땅이었다. 그런 나라의 모형은 고난이 준비된 땅에서 큰 고난을 겪으면서 세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삶의 지난함과 구원은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가 고난의 길을 굳이 가야만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에서 모진 고난을 이겨내려면 그 고난을 감수할 만한 훈련이 있어야 했다. 애굽의 하비루 생활은 바로 이것을 위한 준비였다. 그러니 '너희는 애굽에서 종살이했었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신신당부에는 이런 큰 뜻이 담겨있었다. 가장 큰 고난 경험을 통해서만 가장 강인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히브리 민족이 애굽에서 4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그토록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하비루의 하나님’이다. 4천여 년 전의 그 시대는 우상 신들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우상의 신들은 가진 자, 힘 있는 지배자의 신들이었다. 신을 사유화하고 독점하여 자기 권력을 강화해 오던 시대였다. 거짓 신앙세계를 지배하는 사탄은 그런 인간들의 탐욕을 이용하였다.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신이 되어 약한 90%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지상 지옥을 건설함이 사탄의 의도였다. 어떤 경우에도 사탄이나 그 추종 세력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신 노릇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사탄적 책략에 편승한 사교들은 자신들이 마치 부자와 지배자가 되는 비법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을 희유하고 속여 왔다. 그런 맥락에서 교회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기복성 종교들은 결국 악마의 본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히브리인들의 하비루 삶을 경험시킨, 그래서 건설하려는 하나님의 나라 모형은 어떤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을 제시하였다.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이 작아지고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는 삶이었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여 섬겨야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것이다. 이 세상 속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는 낮아지고 작아져서 섬기는 나라이다. 이런 모형을 보이고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어 낮고 천한 하비루가 되게 하셨다. '하비루가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가를 뼈저리게 겪었으니 너희에게 주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너희 가운데 절대 하비루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하비루의 대명사인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하나님의 직계가족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밥상에서 밥을 먹는 자들이니 하나님은 '하비루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결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은가? 하나님을 보고 싶은가? 먼저 하비루가 되어야 한다. 외적 상태가 아닌, 마음의 상태가 낮고 순전해지는 것, 즉 심령이 가난 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성경은 이런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수차례 말해 온 바이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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