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 21: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 전1:2~11
‘나에게로 오라. 너희가 내게로 오면 내가 멍에를 너희 어깨에 지울 것이야’’ 멍에는 주인이 이끄는 대로 가야 하는 결박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쉼이라고 한다. 베드로에게 하였던 예수의 말씀에서도 이 난해함이 더해진다.“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솔로몬의 연인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약혼 목걸이를 항상 목에 메고 있었다. 열 드라크마로 만들어진 그 목걸이는 신랑이 준 예속의 증표로서 그 드라크마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그것을 목에 거는 이유는 신랑이 이끌어 가는 대로 가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을 신랑, 우리 교회를 그의 신부라고 묘사해왔다.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이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삶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이 교만해지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오다 보니 목이 뻣뻣해져 버렸다. 그러니 멍에를 걸어 끌고 가는 것이 쉼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1. 사는 모든 일의 고단 함이라
인생이 하나님을 찾으면 분명 쉼을 주신다. 하지만 주시돼 먼저 끊어내고 주신다. 삶이 고단하고 힘든 이유는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자기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8) 매번 자기가 원하는 어떤 것이 있으니 입고 먹고 누리는 거주 공간, 사람들 관심, 그리고 그 사람들을 부릴 힘 등, 욕망이 자기 성에 차지 않으니 피곤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강제로 끊어 주신다. 즉 죽이신다. 그 방법으로 사랑하는 이의 멍에를 메주겠다는 것이다. 그 욕망들을 강제로 끊어내게 만들고 강제로 멍에를 메게 한 다음에 우리로 피곤치 않게 하신다. 피곤할 거리가 사라졌으니 피곤할 것이 없다. 이것이 교회요 성도인 우리들의 삶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늘의 교회들이 무엇을 집요하게 구하고 있는가? 고단한 삶, 피곤한 삶을 더해 달라고 강짜를 부리고 있지는 않는가?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더하여 달라고 발버둥 치고 있기 때문에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갈수록 피곤할 뿐이다. 설령, 그런다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아니지만 더 얻어서 자신을 더 피곤하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목사님이 교통사고로 죽음 직전에서 살아났다. 그 며칠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때 경험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죽음이 내 눈앞에 닥치는 순간, 나의 모든 정욕, 불안, 고통, 미움, 아픔이 일시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이 그 순간 너무나 명확하게 깨달아졌기 때문이다.' 죽음이 자기 코앞에 이르자 그동안 자신이 이루지 못해 안타까웠던 것, 용서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것, 상대적 궁핍으로 부끄러워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더라는 말이다. 사실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인생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가? 죽음 저편, 이 세상에서 그 세상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다 소멸됨을 그 죽는 순간에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2. 현실의 나와 로망의 나
왜 우리의 삶이, 우리 사는 인생 과정이 피곤한가? 우리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내가 덜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못 죽으니 하나님이 대신 나를 죽인다. 완전히 죽지 않아서 그 나라를 소망하지 않는 우리들, 여전히 이 세상에서 승부와 결판을 보려 하는 우리들, 그러니 삶이 고단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를, 우리에 대하여 세상을 끊어내신다. 그것이다. 왜 하나님이 내 원하는 것에 못을 치는지를 경험함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니 무엇이 안 된다고들 안달하고 무엇이 부족하다고 원망하며 되고 싶은 내 자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절망하겠는가? 어차피 다 두고 떠난다. 야곱의 얍복강 체험은 우리 인생 가운데 계속 반복된다. 하나님이 쇠몽둥이로 계속 우리를 깨뜨리고자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살만하면, 편안하여 마음이 풀릴만하면 ‘두더지 잡듯이’ 때리고 또 때리서 ‘너 죽어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쉼이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이 쉼을 얻는 길은 하나님께 깨지고 부서짐을 당하여 나의 욕심과 바람에서 죽어 자유함에 있다. 그것을 통과해야 자유로운 인생이 되어 사명으로 사는 세상을 경험케 된다. 종종 국내외의 저명한 인사들이 자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기자회견을 듣는데 그 공개 선언으로 자녀에게 재산 안 물려줄 것을 결정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한다. 어차피 다 기부하겠다고 했으니 이제 '어떻게 모을까'도 걱정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해서 자아가 죽은 것이다. 믿는 사람도 삶의 일부 분야에 있어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고 삶의 자유를 누리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가? 사실, 재산가의 경우, 현실에서 자녀들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진정한 자유는 육신의 소욕이 죽을 때, 현실의 영광과 가치 추구적 삶이 박살날 때 온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도 몽둥이로 우리를 부수고 내일도 회초리로 우리를 치신다. 그렇게. 얻어맞는 가운데 ‘하나님의 의’만 붙들어 왔다. 그럼에도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스물거리며 그것이 그 회초리를 매번 막아내고 하나님을 향해 오히려 대항케 한다. 바울은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3.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신앙으로서 갈등은 시작되었다. 나를 묻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과 절대 신앙이라는 무덤에 묻히지 않겠다는 내 옛 습성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그런데 내 마음의 법이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 빈번히 깨진다. 우리와 달리 바울은 사도였다. 그런 사도도 빈번히 깨졌다. 그때 성령 받은 그의 마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 가운데서 나를 좀 건져주오!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 좀 기억해 주세요.‘ 이런 고백이 나왔다. 이것이 우리의 죽음이다.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삶인 것이다. 그렇게 탄식했던 바울이 반전을 고백하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나는 이런 곤고한 존재인데 ‘하나님의 의’를 부어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구나!‘ 그런 감사로 인생을 찬양하고 감사하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가 진정한 의이고 ’우리 인간의 의‘라는 것은 이렇듯 초라하다. 이런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주리고 목마름이다. '하나님의 의'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이다. 사회에서 바르게 사는 것,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아니라 자기 한계와 절망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죽이신다. 그래야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복음 앞에서 인간인 자신의 불가능과 무력을 매일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지 않으면 정말 가능성이 없는 자기 실체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그 하늘 의를 간절히 바라는 자로 만들어져 간다.
이것이 변화이다. 자기 부족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의만 붙드는 상태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간절한 부르짖음이 터져 나올 때,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낸, 또는 만들려고 하는 의를 가치 없는 배설물로 여기게 된다. 그렇게 자아가 죽은 상태에서 진정 내 속에서 사는 ‘예수의 삶’이 나온다. 의인은 그렇게 교회라는 무덤에서 육적 자아의 죽음을 체험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끝까지 육신적 자아의 성공과 가치를 추동하고자 동분서주하다가 허무한 삶으로, 영원한 사망으로 던져질 인생이었다. 그러니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하나님의 의를 붙들라. 그런 자가 의인이다. 그런 인생들이 구원으로 초청받은 의인이다.
결론
세상에는 여전히 다른 것에 주리고 목마른 인생들로 북새통이다.. 돈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식에 주리고 목마른 자, 건강에 주리고 목마른 자, 성공에 주리고 목마른 자, 혹 이런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오늘의 교회 집단은 아닌가를 스스로 돌아본다.. 하나님의 자식들인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욕심, 욕망들을 끊어내신다. 그것도 강제로 끊어내신다. 그리고 멍에를 지우신다. 그리고는 그것을 쉼이라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 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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