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9. 16:0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시19:1~6)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사람들이 말하곤 한다. 일면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지 체험의 종교가 아니다. 이 점은 기독교와 세상 다른 종교와의 차이이기도 하다. 다른 종교는 인간이 자신들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찾아가지만 기독교는 초월적인 하나님이 제한적 이성의 인간에게 찾아왔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다. 그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두 가지 방식으로 계시하셨다.
1.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별하게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그 하나가 인간과 자연 우주의 질서를 통해서 보여 지는 일반계시이다. 성경에도 곳곳에 그 일반계시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자연과 인간 양심, 진선미에 일반계시가 깃들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직접 설명한 특별계시로서 소위 성경이라는 기록물이다. 성경은 1,500년 동안 쓰인 책이다. BC1,500년경의 모세에서부터 예수가 부활 승천하신 후 사도들에 의해 쓰인 서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량과 시간 속에 기록되었다.
구약이 현재의 39권으로 확정된 것은 BC 90년경 야무니야 회의에서, 신약이 현재의 27권으로 결정된 것은 397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에서였다. 성경은 원래 장절 구분이 없이 기록되었고 지금의 성경처럼 소제목도 물론 없었다. 1551년 비로소 독자들이 찾기 쉽고 읽기 쉽도록 장과 절이 구분이 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기에 절대무오 하다는 축자영감설을 믿는다. 한자 한자가 모두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속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는다. 예수의 탄생을 신화나 설화로 취급하고 부활은 더욱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인생 지침서에 불과하며 오류가 많은 책으로 본다. 노자의 도덕경이나 석가모니의 불경처럼 도덕책과 동류로 보는 것이다.
신비주의적 신앙인들이나 완벽주의적 종교인들은 성경이 모두 완성되어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것으로 기대해왔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바램과 달리, 성경은 기록에 1,500년이나 걸렸고 각기 다른 40여명이 저술 하였다. 게다가 오늘날의 성경으로 확정된 것도 4세기이었다. 이런 사실에 성경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럼에도 믿음이 신실한 이들은 성경이 한 분의 저자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쓰였진 사실을 믿는다. 그리고 그 성경은 어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기록되었음도 믿는다. 그 한 가지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다. 더 거시적으로 표현하면,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그 주제로 하여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쓰여진 한 권의 책이다.
2. 유기적이고 점진적으로
그 성경을 해석함에는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이 있다. 조직신학적 관점과 성서신학적 관점이다. 성경 66권은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다. 세대별로 다른 구원 방법을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대주제 아래 한 권으로 통일되어 있고 유기적이다. 그러한 유기적 통일성 아래, 신에 관한 개념과 내용을 정리한 것이 조직신학의 신론이고 인간 구원에 관한 내용과 개념을 정리한 것이 구원론이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정리한 것이 인간론이다. 조직신학은 성경 전체가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신학이다. 성경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전체가 유기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시간과 역사를 고려하여 성경을 해석해 나간다. 아담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노아시대에 나타났고 아브라함 시대와 출애굽 시대, 그리고 다윗의 시대에는 어떻게 나타났으며 예수의 신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그 점진적 계시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 보이는 역사관이 있다. 직선적 역사관이다. 순환적 역사관과 비교해서 직선적 역사관이란 이 땅의 역사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역사관이다. 반면, 동양사상이나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은 역사가 시작과 끝이 없고 스스로 그렇게 존재했으며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순환적 역사관이다. 그래서 그들은 피조물을 자연이라 부른다. 사실 自然은 하나님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스스로 자(自) 그럴 연(然)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뜻이니 이 표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당신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 알려준 이름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을 거대한 신으로 보았다. 토테미즘과 에니미즘은 물론이고 범신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이 신이기에 그것을 깨닫는 자들이 신이거나 최소한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신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이 자연이라 부르는 것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며 그 피조물을 창조한 분만이 ‘스스로 계신 자’라고 말이다. 그 분에 의해 시간이 시작되었고 물질과 공간이 창조되었으며 이 역사는 끝없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있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읽는 이들이나 해석한 사람들은 역사의 종말이 있음을 인지하고 종말론적 삶을 산다. 한 세상 살고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이 있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을 소위 신앙생활이라 한다. 인간은 순환 논리에 의해 다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종말과 심판이라는 무서운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성경은 시작에서부터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 한결같이 말한다. 이렇듯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주제로 우리에게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고 있다.
3. 에덴동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성경의 주제를 미시적으로 보면 사랑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다. 성경은 일관성 있게 구원의 길과 예수, 그리고 그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역사만 기록되어 있다. 구원사를 이끄는 하나님은 약속으로 시작하여 약속으로 끝낸다는 주권자임을 명확히 전한다. 창세기에서 타락한 인간이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점진적 계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 때 가나안 입성으로 그 주제 설명이 초보적으로 끝나고 사사기에서 또 타락하니 사무엘하에서 솔로몬이 성전 완성으로 또 끝나고 열왕기서에서 또 타락하니 포로귀환자들 중 경건한 자들로 다시 성전을 완공하여 또 한번 끝이 난다. 성문서에서 그 지혜,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설명하며 또 한번 끝이 나고 전기 예언서에서 다시 인간의 타락을 보여주고 후기 예언서에서 또 성전 완성을 다시 보여 주었다 급기야 말라기에서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함을 보이면서 마태복음을 열어 예수를 등장시켰다. 구약에서 그림자로 보여주었던 구원 드라마의 실체를 신약에서 예수의 등장으로 보여 준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중의 유대인이라는 니고데모에게 그가 가진 배경이 그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려 준 반면, 인간적인 면에서 전혀 불가능한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그녀의 구원이 인간 쪽에서 전혀 근거 없음을 비교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 또는 자기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38년 된 병자를 구함으로서 구원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밝혔다.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풍성한 하늘 떡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가 성령에 의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지를 사도행전에서 설명하였고 그것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로마서이다. 이후 고린도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우리의 행동지침으로서 신약의 시내산 언약과 같다. 그리고 대단원의 계시록으로 마친다. 그러니 성경은 온통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사실, 구약에 곳곳에 그리스도가 숨어 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믿음의 조상의 행적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 이야기이다. 우상을 섬기며 자기 유익을 위해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사람을 모리아산의 신앙인으로 만들어 가는 하나님이 중심 주제인 것이다. 불가능한 인간을 당신의 벗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을 죽여 원수들을 살려내는 은혜, 즉 예수의 십자가로 완성될 것을 예표함이 아브라함 이야기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요12:41)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이사야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 모세도 예수를 위해 능욕을 받았다. 그러니 구약의 여러 인물과 역사들이 예수를 설명한다. 그 이야기들이 예수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으니 바로 그가 마지막 계시이다. 성경의 모든 계시가 예수로 수렴되기에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예수로 결론지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무리
우리들은 이 세상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땅의 삶 다음에 오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 성경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소망이 적혀있는 책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관해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한된 이성의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완성되어 주어진 계시로서의 성경,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성경에 무엇을 보태거나 빼면 저주를 받을 것임을 엄한 경고로 성경책 마지막에 직접 기록해 놓으셨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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