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6. 23:5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4~29)
신앙을 가진 사람들, 특히 믿음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일수록 자기 삶에 하나님의 특별한 가호가 있기를 믿고 또 원한다. 그래서 믿기에 더 잘 풀려나가고 신앙하기에 더욱 성공한다고 기도하고 확신한다. 그런데 현실을 보자. 정말 그런가? 이기적인 인생들이 더 살 살고 지독한 이들이 더 성공하며 함부로 살고 막사는 데도 더 잘 풀려 나가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정말 신앙으로 살려는 이들에게 세상 현실은 버겁다. 진정 신앙인으로 사는 이들은 함부로 살 수가 없다. 함부로 막 살 수도 없다. 더구나 파렴치하고 염치없는 이들이 벌인 결과적 손해와 부끄러움은 늘 선한 이들의 몫으로 돌아온다. 고난이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고난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인생으로 점철되었던 바울은 알듯 모를듯한 말을 하였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고난의 의미를 꿰뚫고 있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고 말한다. 난해한 말이다. 분명, 예수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고난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에도 뭔가 2% 부족하다는 것인가? 아니다. 구원사역을 위한 고난은 끝났지만 교회를 위한 고난은 여전히 진행된다는 말이다. 이 고난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즉 자기 삶에 채운다고 하였다.
1. 목적이 있는 삶
예수가 이 땅에 죽으려고 오셨으면 그냥 쉽게 죽었으면 될 것을 굳이 그렇게 비참하게 무시당하시고 수난까지 당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공생애 생략하고 바로 십자가만 졌으면 좀 더 간단하고 편했을 터인데 왜 공생애 3년 기간 내내 배반당하고 수모를 겪는 고난의 생고생과 비참함을 당해야 했나?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의 삶과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오늘의 우리 삶이 어려운 이유, 이 땅에서 고난스러운 이유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는 고난을 통과해야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2:10)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5:8)
언뜻 '예수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전에는 뭔가 부족한 분이었는데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오해이다. 예수는 영원 전부터 온전한 하나님이었다. 그럼에도 고난을 통과해서 온전하게 되었다 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시킨 일이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즉, 고난은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뜻이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고난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이다. 예수는 자기를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해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셨다. 자기를 낭떠러지에 밀어 떨어뜨리려 했던 사람도 품어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으로 원수들을 대함이 바로 고난이다.
사람들이 돈 버는 즐거움에 빠져 살고 성공하는 재미에 길들여지고 쾌락에 빠져 살다 보니 고난이라는 것을 사업 실패나 가난함으로만 이해를 하니 대단히 잘못 알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내게 힘이 있고 내 성질대로라면 저 상대방을 짓밟을 수 있음에도 그것을 참고 도리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음, 이것이 고난이다. 그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된 삶을 사는 것이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 다른 말로 ‘고난을 당하였더니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는 것, 즉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2. 두 증인의 예
계시록 11장에는 두 증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 순교로 비참하게 죽었더니 남은 자들이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는 것이다.(계11:13) 이 역시 위의 빌2:11절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로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두 증인의 순교적 고난을 허락하셨고 예수도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뜻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당신을 전하고 구원하신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고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도 그 자리로 부른다.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 그분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 이것이 하늘 백성인 우리 삶의 원리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 가기 전에 이미 이런 삶을 연습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을 행하게 되어 있다. 율법적으로 산다고 하늘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산다 하여 (인간이란 그렇게 살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천국 백성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의 고난, 즉 나의 죽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삶의 고난에는 분명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 오늘 우리 삶의 고난을 통해서 누군가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지금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당하는 그 고난적 삶을 통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참는 삶을 보면서 지금 그 누군가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의 그 같은 고난적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 나라가 완성되도록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수난의 삶을 주셨다. 이유는 여호와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예수의 상함과 고난과 찔림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도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수난과 고난의 삶을 주신다.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우리가 거룩해져야 그 나라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거룩하다'는 뜻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냄이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진다.
3.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복음적 삶에 고난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을 둘씩 파송하면서 그들이 당할 고난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너희를 위하여 돈 주머니 가지지 말라. 총독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그것은 도리어 이방인들에게 복음 증거의 기회이라.”(마10:18) 마태복음 10장을 다 할애할 정도로 길게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만큼 고난은 복음적인 삶의 과정에 필연적임을 말해준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내 삶에 고난이 없다면 복음 전파가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제자들은 그 고난의 삶을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다. 사도행전에 보면, 12사도들은 관원들과 재판정에 섰으며 그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도했다. 바울도 벨릭스 총독, 아그립바 왕, 심지어 로마 황제 앞에 서서 복음 전도할 기회를 원했다. 모든 위기를 도리어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았고 실제로 당시 고위직 인사들 중에 결신자를 얻기도 했다.
교회사 기록에 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원형경기장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만천하 사람들이 보는데서 고난을 당하였다. 그 고난당하는 모양을 보면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희롱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부 사람들은 회개하였다. 고난 앞에 의연한 복음의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핍박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었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를 양육함에 남은 고난을 채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복음을 전파해서 각 사람을 제자로 성숙시키는 데에는 아비가 자식에게 함같이, 어머니의 해산하는 수고처럼, 스승으로서 본을 보이는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 일도 거저 이루어지지 않고 쉽게 되는 일은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 나라의 일이다. 마귀 제국을 이겨야 비로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일이 어찌 고난 없이 쉽겠는가? 입술의 고난이 아니요 육체의 고난이다. 육체, 즉 삶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내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늘 비밀을 전하며 구원에 일조하는 고난을 기꺼이 살아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그분을 통해서 그 일을 한다고 바울은 고백하였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9) 소망의 메신저로서 내가 억지로 함이 아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분으로 가능하다.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 그 충만으로 그분을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5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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