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23. 11:1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15:1~7)
무엇이든지 하면 잘 할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믿으면 믿는 사람다움을 제대로 보이려 한다. 하지만 유독 신앙에서는 그것이 잘 안된다. 그래서 종종 신앙적 침륜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신자 밎나? 이런 정도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신앙적 착각에서 비릇된 함정이다. 예수와 함께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남, 이 사실이 믿어지면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은혜’가 임함을 놓친 것이다. 이를 바울은 롬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었다. “그러므로 이것(하나님을 믿은 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나님을 믿을 때 그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진짜 의로워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이제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여겨주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
1. 의로 여겨주시는 은혜로
그 ‘여겨주시는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음을 믿을 때, 하 나님이 우리에게 ‘의롭게 여겨주시는 은혜’를 주신다. 우리 모두의 현주소가 ‘죄인’이기에 실상 매일 죄를 짓고 산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위해 대신하여 죽고 부활하였다. 이 사실을 믿기는가? 믿어지면 그 믿음이 ‘의롭게 여겨주시는 은혜’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바라니 그것이 우리에게 실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다.
매일 죄짓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 실상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그 은혜’가 우리의 실상이다. 내 삶의 지금, 죄인적 삶과 이루어진 사실, 즉 의인적 신분을 믿는 삶, 이 둘 가운데는 큰 괴리가 있다. 현실에서 죄를 짓고 넘어지면 우리는 절망하고 의심하며 불안하여 두려워진다. 이 ‘내 현실, 현주소’와 ‘예수가 이미 이룬 일’ 사이의 그 간격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믿음이다. 믿음으로 채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그 말씀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으로 채워야 한다. 내 현실은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이 믿음으로 내가 의인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는다.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3~24)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처럼 의로 여기심(칭의)을 받음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내가 완전한 의인은 아닐지라도 나는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믿는다. 그 믿은 가운데 점차적인 의인으로 성화되어 간다.
2. 성령이 도우시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하나님)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우리에게 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픔, 상처, 약함도 있고 부담스러운 기억도 있다. 이런 죽을 몸에서, 이런 죽을 자들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일으킨 성령의 능력이 내 삶을 살려 다시 세웠다. 그러니 우리는 살면서 역설적 진리, 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 넘치는 역설의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 살면서 절망적 시간들을 경험했었다. 배신당할 때, 질병으로 힘들 때, 살아 갈 길이 막혔을 때 등, 이런저런 어려움과 곤고한 처지들을 경험해왔다.
하지만 영적인 면에서, 하나님에게 그 아들이 죽은 것보다 더 절망적이겠는가? 그것은 우리의 죄와 악, 고통과 괴로움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과 절망에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면 우리의 악, 고통, 괴로움에서 일으킴 받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다. 그것을 믿도록 가능하게 하는 힘이 성령이다. 우리가 가난해지면 얼마나 가난해지나? 배신당해봐야 얼마나 큰 배신을 당하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죽은 것만큼 절망적이고 비참하겠는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 성령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고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면서 우리 죽을 몸, 정신, 자세, 가치관을 일으켜 다시 살리신다.
절망적이고 비참한 순간에 성령이 그 예수를 일으켰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 새롭게 못할 상처가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죄의 결박이 없다. 이것을 받아들임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능력을 확신하며 이렇게 외쳤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에게 절망이란 없다. 때로 무덤 가운데 갇힌 듯 여전히 답답한 현실이고 회개하고도 또 죄를 짓는 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들이지만 예수를 죽음에서 살린 성령의 능력을 신뢰하니 이루어진 사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된 은혜로 살아간다.
3. 거룩함은 이미 이루어진 사실
사람들은 성화를 ‘미래적 사건’으로 본다. 하지만 성경은 과거와 완료적 사건으로 말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죄를 짓는다. 그럴 때마다 속상하다. 작정기도를 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일상 복귀를 한 후 조만간 또 죄를 지으니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특히 직분자일 경우, 스스로 무너지니 스스로 큰 낙심에 빠진다.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를 보면서 나약해지는가? 나만 나를 실족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서도 나를 실족케 한다. 사탄도 나를 비방하고 정죄한다. 그래서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다. 그즈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도 생겨난다. ‘왜 나는 이 모양인가? 왜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나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지!’ 이 은혜를 기억하자.
우리는 다시 예수와 함께 살아났다. 성령이 살렸다. 절망의 순간, 그 사망 권세와 죄의 권세를 이긴 영, 그 성령이 내 안에 있음을 믿는다면 ‘나는 이미 거룩하여졌지!’라고 믿는다. 이것은 시제상 ‘완료’ 이다. 사탄이 나를 정죄하더라도 내가 거룩해진 사실은 이미 예수의 십자가로 ‘완료’ 되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여기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원문 ‘하기아조’가 완료형 수동분사‘. 시제가 완료라 함은 이미 완성되었다, 끝난 사실이라는 말이다. 여전히 부족하고 제대로 살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하나님이 더 이상 진노의 얼굴로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긍휼의 얼굴로 바라보신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상거가 멀지만 달려오시는 부모의 심정으로 바라보신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이룬 모든 일을 믿는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감정과 이성과 의지가 역동적으로 깨어나면서 긍휼의 원리, 은혜의 통치가 내게 적용된다. 아무것도 안 일어난 것 같지만 실상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주어졌다.“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는 정죄가 없다. 이 생명의 성령 법이 나를 통치할 떄, 하나님의 신적 능력이 작용하면서 내 안에 남아있는 죄성들이 무너진다. 상처와 아픔의 사슬이 끊어진다. 미움의 가시도 뽑혀진다. 터진 내 영혼의 살들이 아물어지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은혜로 살기에 우리는 예수를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긍휼의 원리인 십자가, 그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결론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의 삶,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성령에 의해 살아났으니 성령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내 에너지 공급원이 긍휼을 통해서 공급된다. 이 긍휼의 통로가 막히면 마치 머리깎인 삼손처럼 무능해지고 무력해진다. 그래서 이 긍휼의 원리가 새 피조물이 된 우리에게 필요하다. 십자가가 매일 필요한 것이다. 이미 구원 받았는데, 과거 완료로 끝났는데 왜 매일 십자가로 또 가야하나? 그 이유는 그 십자가에서 거룩한 에너지를 공급받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은혜, 그때의 여겨주심, 그것은 이미 완성된 거룩함이었다. 다만 오늘의 경건, 지금의 거룩을 날마다 새롭게 공급받아야 하는 것이다.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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