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8. 10:5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38~45)
<소유냐 존재냐>는 에릭 프롬의 유명한 명저이다. ‘소유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 존재형 인간으로 살 것인가?’ 이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소유지향과 이윤 추구를 중심 가치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인생들이 더 많은 물질 수단과 더 많은 경제 가치를 추구하며 일생을 소모한다. 오늘날에는 소유에 대한 추구 대상이 지식과 사랑과 신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의 목적과 방향을 잃은채 외우기만 하는 성적주의, 사랑과 애정보다 조건과 배경을 더 우선시하는 결혼문화, 순수와 본질보다 헌금 액수와 교세 규모를 지향하는 교회들, 그 추구하는 대상을 얼마나 소유했는가로 성공과 실패를 판단 한다.
1. 존재 지향
소유 지향적 삶의 반대편에 있는 삶은 무엇일까? 프롬은 그것을 존재 지향적 삶이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행복하고 불행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구축하는 삶이다. 소유 지향적 삶은 그 소유 대상이 사라지거나 줄어들면 상실감을 느끼지만 존재 지향적 삶은 그 소유의 변화로 행복과 불행의 롤러코스트를 타지 않는다. 존재가 소유를 지배해야지 소유가 존재를 지배하게 함에서 인간 삶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러니 소유 지향적 존재에서 존재 지향적 존재로 바뀌어야 인간 삶이 행복해지고 당당해질 수 있다. 소유는 사용에 따라 감소하나 존재는 삶을 통해 증대한다. 이것이 소유의 증대를 목표로 살기 보다는 인간존재의 가치 향상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어보면, 이 방향 또한 모두 옳다고 볼 수만도 없다. 성경은 그 모든 것을 다 뭉뚱그려 ‘죄’라 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소유를 늘이고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도록 창조된 존재도 아니지만, 자기라는 존재의 성숙과 발전과 향상을 위해 창조된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인간이 착해지고 순결해져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프롬은 그런 삶을 존재 지향적 삶이라 분류했지만 성경은 그 또한 소유 지향적 삶이라 정의하였다. 신이 되고 싶어 했던 인간의 죄성은 자기 존재의 선함까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었다.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여 청빈한 삶을 자기 트레이드마크로 삼았던 어떤 스님, 사회개혁을 위한 투쟁이나 운동, 구제도 자기 소유로 붙드는 삶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관심은 그런 행위를 하는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앎에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내 모든 것을 다 털어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도록 내놓는 헌신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을 아는 행위가 아니라면 모두 헛것이다. 우리 행위는 하나님이라는 사랑의 본체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성숙이나 변화를 보여주는 행위, 평판, 가치추구의 일환으로 드러나는 일체의 선행들이 모두 죄인 것이다. 그런 처신은 공중 권세 잡은 귀신의 종으로 사는 삶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의 원대로 하는 이들은 불순종의 사람들이니 하나님은 그런 삶에 진노하신다.
2. 일곱 귀신
어떤 사람 속에 귀신이 살고 있었다. 귀신이란 실체적 마귀이면서 우리 내면의 자기 숭배적 경향들이다. 입에 거품 물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귀신들림이 아니라 정신 질병이다. 인간 뇌세포는 1000억개가 넘는다. 그 뇌세포들이 시냅스라는 장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시스템으로 화학물질을 흘려 정보가 전달된다. 그 뇌세포에서 일하는 신경전달 물질 중 도파민이라는 물질은 몰핀같은 역할로 감정/동기부여/욕망/쾌락에 영향을 미친다. 이 도파민 분비조절에 이상이 생기면 다양한 질환이 생기는데 그 분비가 지나치면 조울증이나 분열증을 일으키고 줄어들면 우울증을 일으킨다. 그래서 귀신들렸다는 사람에게 항도파민제를 주사하면 차분해지는 것이다. 예수는 고작 항도파민제 주사같은 일을 ‘귀신 쫒아내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죄의 뿌리와 관련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8:44) 착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기 영광과 가치와 자랑과 만족을 위한 시도들은 귀신들린 자의 행위이다. 그 주도권도 귀신이 쥐고 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 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귀신이 사람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갔다. 감기청럼 질병이 자기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객체, 즉 종으로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12:27-29)
하나님을 알기 전, 인간은 마귀의 세간이었고 가재도구였을 뿐이다. 마귀의 세간이 행하는 일들은 그 모양이 깨끗하고 훌륭해 보인들 마귀의 행사이다. 그러므로 ‘죽느냐 사느냐’ 혹은 ‘소유냐 존재냐’는 질문에 대한 선택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할 수 없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 주인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며 살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요일3:8) 종은 주인의 선택에 의하여 움직여질 뿐이다. 마귀의 세간은 마귀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고 하늘 시민은 하나님의 선택을 쫓아가게 되어 있다. 종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예수는 그렇게 죄를 선택케 하는 그 마귀를 결박하고 당신 백성들을 거기서 구하고자 왔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늘의 뜻을 선택하게 만들었으니 구원이었다. 그런 우리가 선택하게 될 그 하나님의 뜻은 자기 부인과 믿음이었다.
3. 옛 자아 탈피
십자가 사역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 마귀의 세간을 늑탈해내는 일이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이미 귀신의 세간으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들 중,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만이 예수의 능력으로 마귀의 도시에서 탈출된다.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죄에 순종하는 죄의 종으로, 마귀의 세간으로, 귀신에게 들려 태어났다. 그러나 그 삶에 하나님의 의가 침투하여 귀신을 결박하고 죄의 세력에서 끌어내니 의의 종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 이룬 공헌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혹, 아담적 욕망을 채우려고 사랑이나 헌신, 또는 섬김과 봉사를 흉내내는 삶이 있을 수는 있다. 마태복음은 그것을 ‘깨끗이 소제되어 있다’고 표현하였다.
귀신이 다른 거처를 찾아 외출을 하였다. 물 없는 곳, 즉 은혜의 생수가 없는 곳을 찾아 거처를 마련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는 이미 다른 귀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원래의 곳으로 왔더니 깨끗이 소제가 되어 있었다. 이에 귀신은 동료 일곱 귀신을 데리고 들어가 더 난장판으로 산다. 여기 일곱은 산술적 의미가 아니라 완전수로서 최악의 상황을 뜻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깨끗함 흉내는 그 자체로 일곱 귀신 들린 상태라는 말이다. 불교나 동양철학에서는 '선'이라 하여 '마음을 비운다'고 그 상태를 '몰아', 혹은 '무아'라 한다. 그 상태가 되면 삶이 정갈하고 깨끗해진다고 믿는다. 무소유의 삶도 거기서 나왔다. 정갈한 마음에서 깨끗하고 선한 삶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비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비움은 ‘성령으로 채워짐’ 이다. 귀신적 삶의 원리와 욕망이 빠져나가고 성령으로 채워진 마음을 비움이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성경 박사들이었다. 선한 행실, 종교 행위에 있어 누구보다도 철저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고 하였고 ‘여전히 마귀의 세간’이라 하였으며 ‘너희가 바로 일곱 귀신 들린 자들’이라고 일갈하였다. 그런 거짓 비움으로 우월감을 갖고 사는 태도에 ‘성령 훼방죄’라 하며 그런 행위는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책망하였다.“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마무리
하나님 나라는 용서의 법칙으로 성취되고 운영된다. 용서받아야 될 존재라 함은 자기 무기력과 불가능이 전제된다. 그래야 용서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다른 존재라는 차별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별 의식이 더욱 그들로 더 착해지려 애써게 하였고 더 경건해지도록 노력하게 하였다. 그들의 엘리트주의, 우월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였다. ‘너희들 지금 성령을 훼방하는 중인 거 알아?’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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