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9. 00: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니라."(사43:1~7)
주요 대상이나 경기에서 자주 듣는 수상 소감들,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말들이 있다. 그만큼 기독교인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승자의 수상소감에는 영광스런 자리에서 그 자리에 서기까지 도와준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 그리고 신자로서 그런 큰 상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는 일견 대견한 마음이리라. 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그들의 성공을 흡족해 하면서 거기에서만 영광을 받으실까? 혹 그렇다면 일이 잘 안 되고 삶이 불화에 빠진 사람, 자식까지 뜻대로 되지 않는 데다가 몸에 병까지 지니고 사는 인생들은 하나님께 영광은 커녕, 누가 되는 인생들인가? ‘하나님의 나라’도 승자, 1등, 성공한 사람만 높이 평가하는 경쟁사회인가?
1. 성공과 세속주의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성공과 세속주의가 자기 마음대로 상정해 놓은 거짓 영광들이다. 화려한 삶, 경제적 성공, 그것으로 인해 명예나 지위가 올라가면 하나님께 영광, 그 반대의 자리로 떨어짐은 3류 인생이요 실패자로 여기는 것은 세속적 가치관에서 따지는 영광이지 성경이 말하는 영광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그런 영광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사람도 소수일 뿐이다. 또한 그런 자리에 선다 한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존재이기에 수상소감 다음 날이면 그 감동과 감격을 잊는다. 그러니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은 기독교적인 태도가 아니요 바람적한 신앙적 삶도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다.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 되심으로 드러난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제대로 성취되고 그의 통치가 옳게 시행되는 그 자체를 ‘신의 영광’이라 하니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끄는 대로 사는 신자의 삶을 말한다. 예수가 자신의 하는 사역을 빗대어 항상 하던 말이 있었다.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지금 일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전능자에 의하여 쉼 없이, 그리고 자동적으로 우리 삶에 나타난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일들이 영광이다. 우리가 그의 나라에 들어감, 즉 그의 다스림에 참여함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자의 통치에 순종하여 매일 매일 산다.
피조물들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산다. 해, 달, 별, 자연, 동식물이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존재한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니 기특한 일을 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불순종하는 자로 나누어지기도 하지만 그 두 부류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 하나님의 작정 아래 움직이는 거이다. 그 작정에는 우발적으로 태어난 존재가 없고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도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움직이니 이 우주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이이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인생들은 그 모양이 어떠하든 이미 영광스러운 삶이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2. 존재 자체가 영광
우리는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창조되었다. 하늘 백성은 하늘 통치 아래 살도록, 그의 뜻대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들이다. 그렇게 우리 삶에 하나님 통치가 시행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역사에서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의 삶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더 확대하면, 사찰 승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사람이고 교도소의 많은 수인들도 그의 영광을 위해 창조한 이들이며 교회 안에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가? 이런 문제는 차후 사안이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요 수단이다. 우리는 원래 죽은 흙이었던 존재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계획에서 영적 존재로 하나님에 의해 쓰여졌으니 이 자체가 영광이다. 각자의 인생을 통해, 집단의 역사를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고 믿게 하니 이것이 영광이다. 사람들은 이 ‘영광’이라는 개념을 을 국어사전적으로만 이해하려 하니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세상적 가치관과 현실적 세계관으로만 보기 때문에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 화려한 것과 초라한 것으로 나누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구분 없다.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는 태생적 영광이니 살아 숨을 쉬는 그 자체가 영광이며 기쁨인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후천적 영광도 있다. 우리가 성숙해가면서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생이 되는 것, 자기의 처음 자리가 어딘지 아는 깨달음, 바로 신자로서의 삶이다. 우리의 처음 자리는 티끌이요 흙이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자기의 처음 자리가 어디인지 깨닫고 그 사실을 인생과 역사에서 선명하게 배워나간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면 알수록 내가 죄인중의 괴수임을, 바로 내가 예수를 못 박은 당사자임을 알아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우리를 역사에 투입시켜 당신과 그 나라를 드러내는 능력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의 도구로 쓰이는 인생이 영광스런 삶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말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기뻐하시고 실망하시는 분이 아니다. 당신의 하심이 온전히 우리 인생에 녹아남이 영광인 것이다.
3. 삼류 인생은 없다
하나님이 허락한 자기 배역에 충실히 살며 그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그리고 그 자체가 기쁨이니 전지전능한 존재가 나를 통치하고 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을 모르니 어떤 인생들은 ‘하나님이 나를 쓰는 것이 왜 영광이란 말인가?’ 이런 볼맨 소리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알려 해 본 적이 없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해 본 적이 없는 인생들이었기에 그런 태도가 나온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금도를 도발한 이레, 인간은 하나님처럼 된 자기가 진짜 자기 모습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런 세상 마귀, 세속의 통치를 받는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존재함이 영광이요 기쁨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오늘도 진정한 영광의 자리로 이끌리고 있다. 그래서 항상 기뻐게 살 수 있다. 세상에 내놓을만한 성공이 없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 나라의 풍요를 설명하고자 어떤 이에게 부를 허락하였다. 하나님을 떠난 피조물의 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하고자 가난과 질병과 전쟁을 허락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 작정에 따라 재능과 기회를 허락하기도 하고 때로 악하고 더러운 죄의 기회를 허락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일상과 사건과 관계에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배우고 인간과 죄를 체감한다. 그 모든 과정이 지향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 더 엄밀히 말해 이미 완료된 자기 모습을 이루어가고자 자기 옛모습을 점차 벗어나는 것이다. 그 과정 전체가 하나님 나라요 통치인데 그것이 우리 삶에 나타나는 현장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영화롭게 된 자이다. 멋진 옷에 얼굴이 황금으로 빛나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하늘 시민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 영광이 하나님에게서 비춰지니 우리또한 그 영광을 반사하여 영광으로 흘려낸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영화롭게 되었다는 말의 진의이다. 그러니 살면서 격는 실패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여정이다. 내 삶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부자가 되든 가난하게 되든, 명예를 얻든 수치를 안든, 일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그간 내가 너무 엉터리로 살았는데’ 회한이 남아도 그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생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교사이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협력시켜 선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루저 인생, 실패자, 삼류 인생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영화로운 존재로 지금도 바뀌어가고 있을 뿐이다.
마무리
물론, 자유의지라는 우리의 책임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작은 그림이다. 큰 그림은 하나님이 그런 방향과 목적으로 이끄심이다. 그 과정에 승리도 있고 실패도 있으며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작정된 길로 이끈다. 하나님이 작정해 이끄니 과정의 작은 패배에 연연하지 말고 큰 그림을 보며 믿음의 삶을 다지자. 당신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소모하는 매일의 시간들이 하늘 영광의 실현 현장이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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