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 21: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한 목사가 친구인 정신과 의사의 병원을 방문하였다. 그 친구가 한 환자를 상담하고 있었다. 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목사는 친구에게 왜 저렇게 우울증에 걸렸는지 물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식 며칠 앞두고 도망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그 충격이지’ 그런데 그 옆 병실에 같은 증상의 남자가 입원을 해 있었다. 목사는 저 남자는 왜 저리 되었는지 물었다. ‘바로 그가 옆방 남자가 사랑하던 여자와 도망쳐서 결혼한 남자야. 그런데 그 여자가 하도 바가지를 긁어서 저렇게 심한 우울증이 온 것이지.’ 떠나버린 여자를 못 잊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 옆방에 그 떠나간 여자에게 괴롭힘 받아 우울증에 걸린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1. 내 유익을 위한 네 희생
인간들은 신의 은혜로 고침 받기 전까지 자기 유익을 위해 상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흡혈귀적 삶을 살아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과거에 그 일만 없었더라면, 그때 그 일만 성공했더라면 ‘‘ 이렇듯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장밋빛 꿈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며 살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오히려 과거에 그 일이 없었더라면 지금 더 험한 지경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그때 그 일이 이루어졌더라면 지금 더 허랑방탕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예수는 “만일 예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이라고 원망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너희가 믿으면"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하셨다. 그렇다.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인간은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어두운 금요일을 취하여 가장 밝은 부활의 주일로 바꾼 예수, 그 예수를 믿는 믿음은 능히 어두운 과거 상처의 인간을 치유한다. 어릴 적부터 학대를 당한 이들은 자기 가치를 낮게 취급하기에 자존감이 낮다는 심리학계의 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을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 사랑하셨고 자기 독자를 내주고 바꿀 정도로 가치 있게 취급해 주셨다. 그런 인간들에게 하늘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자 여러 상황들도 허용하였다. 신의 자녀들은 생애의 일체 작용을 신의 손길 안에서 비릇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런 상처로 간직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매를 맺어가야 하는 이들이 신의 자녀들이다. 예수 안에서 풀어야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된다. 신의 자녀들은 그 복음을 믿는다.
MBTI라는 심리분석기법,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근거로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지표이다. 이 MBTI에 근거해서 누구는 J의 성향이 강하고 누구는 P의 성향이 강하며 누구는 E 외향적이라 하여 상대방을 이해할 때,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고 치료에 앞서 행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기 파악이나 성격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분노를 다스려 주던가? 그 지식이 인간의 상처를 경감시켜주던가? 그렇게 타인과 심리적 선호 차이가 있음을 알면 상대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던가? 십자가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이들이 있다. 십자가로 치유되는 것이 있고 내적 치유나 심리학으로 치유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예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무지이다. 예수의 십자가, 그것 하나로 인간의 모든 저주와 상처들이 해결되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2. 인간의 원죄
삶의 고통이나 고난, 그것으로 생긴 상처들은 인간의 탁함, 즉 죄로 시작되었다. 그러니 그 죄의 해결 방법도 신을 앎에 있다. 신을 아는 지식, 그로 말미암아 신의 뜻으로 사는 자로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 인생의 치유 과정이다. 그 지식을 배우고 기도하며 하늘 소망을 품는 만큼 이 땅에서의 고단한 삶은 희석된다. 소위 구원으로의 여정이다. 삶이 순탄치 않으니, 그래서 인생에 구원이 필요하니 이 과정을 알려 주고자 아브라함을 불러내었고 이스라엘을 광야로 끌어냈으며 예수로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한때 이상한 논리로 교회를 흔들었던 '가계에 흐르는 저주' 같은 무지한 책이 믿음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었다.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유전이 된다는 논리였는데 어이가 없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를 당시 대형교회들이 저자 초청 세미나, 부흥회 특별강사로 모시곤 했었다. 수많은 목사들도 그 강연에 고개를 끄덕이고 은혜(?)를 받았다 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랴. 목회자들이 설교 준비할 때, 그 본문 구절을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어로 먼저 찾아 읽고 거기 쓰인 단어들의 시제나 격을 연구하며 그 단어들의 용례를 성경 전체에서 찾아 신의를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성경 진의와 상관없이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성경 일부 구절들을 특정적으로 끌어다 쓰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신의 말이 아닌 자기들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성경 구절들을 끌어와 자의적으로 강론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나 '치유의 거성'이라는 목사의 책들에서 그런 경향들을 많이 본다.
성경 전체 맥락에서 이해한 구절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성경 몇 구절만 떼어 그럴듯하게 맞추어 쓰는 구절 중 하나가 이 부분이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죗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20:5-6)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내 조상의 저주가 후손인 나의 피를 타고 계속되어 내려온다? 그래서 그 조상의 저주를 끊지 않으면 예수를 믿고도 계속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말들은 무당들이나 쓰는 상술이다. 고액의 큰 굿을 주선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을 겁주고자 하는 무당들의 말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3. 로암미에서 암미로
신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로루하마'라 한 그곳에서, '로암미'라 한 그곳에서 내가 다시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고 너희가 다시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호1:6~9, 2:1) 조상의 저주가 후손에게도 계속 전승된다면, 그래서 그 저주를 끊어야만 한다면 하나님의 이 언급은 헛된 약속이다. 조상의 죄와 저주가 오늘 우리 인생, 나의 삶을 지배하여 이렇게 힘들다면, 예수의 희생으로 우리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될 것이라는 호세아의 예언도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때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렘31:29-30) 신은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다 하여 자녀의 이가 시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한다.
신이 천대까지 복을 내린다 함은 그 은혜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고대인들에게 가장 큰 수가 1,000이었기에 1000이란 숫자는 그 은혜의 풍성함에 대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저주가 3,4대까지 흐른다 함도 은혜의 풍성함과 비교한 문학적 표현이다. 정말 저주가 3,4대까지 흐른다면, 다윗이 그런 큰 죄를 지었는데 어찌 그 후손에서 솔로몬이 나오고 예수가 나오겠는가? 그리고 예수를 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후손들이 정말 천 때까지 복을 받아 예수를 믿던가? 예수를 안 믿고 평생 죄만 짓다가 죽은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은 예수 믿을 자격도 없는가? 물론, 도둑 집안에서 도둑이 많이 나옴은 보고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기에 그럴 수 있다.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그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가계에 흐르는 저주로 해석함은 억지이고 사기이다.
이상한 이들의 말대로, 질병이 가계에 흐르는 저주 때문이라면 병을 앓다가 죽은 많은 사도와 사제들이 분노해서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 분명,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모두 우리의 악 때문이다. 신앙생활에도 계속되는 질병과 어려움을 맞닥뜨리면, 그 상황에서 더는 아픔과 상처가 없는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지 예수의 구원만으로 뭔가 부족하다거나 아직 남겨진 저주 때문이 아니다. 유전적 저주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감당해 내야 할 것을 다른 사람이나 조상, 상황에 책임을 전가한다. 이 역시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죄의 성향에서 비릇되었다. 만일 이 중에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그 사람은 이웃의 악이나 조상의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가는 것이다.
결론
어찌 보면, 신의 자녀로서 정직한 삶에 억울함과 고통, 시련은 필연이다. 하늘 양심과 천국 양식으로 살자니 여기 이곳의 악한 세상에서 불가피한 것이다. 하지만 그 상처와 고단함 삶에서 천국의 인격으로 만들어져 간다. 신은 그 고단한 삶, 시련의 여정에 피할 길도 함께 주신다. 이 피할 길이란 그 문제에서 도망감이 아니다. 그 실패에서, 그 고통에서 신의 뜻을 알아 감이다. 사람들 보기에 그 길이 패배의 길이나 미련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고통과 시험은 신의 자녀 다움을 완성함에 필요하다. 그러므로 상처를 준 사람은 신이 보낸 사람 막대기요 인생 채찍일 수 있다. 지나온 어려움들을 삶에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로 원망치 말고 꼭 필요해서 신이 허락했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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