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4. 2. 22:0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사50:4-9)
2000년 전 이스라엘 사회에 정결법 시스템이 이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의인과 죄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병 걸린 사람은 '죄인'이었고 장애인도 '죄인'이었다. 제자들조차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의 죄인지 그의 부모의 죄인지 물을 정도였다. 정결법은 '정죄'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정죄는 '죄가 있다고 단정함' 혹은 '전생에 이미 정해진 죄'라는 뜻이다. 그러니 죄라고 미리 판정하여 비난한다.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그의 행위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것이다. 마가는 약하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폭력적 시스템에 맞서 죽기까지 자비와 긍휼을 보이신 예수의 사랑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1.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
회당에 손이 말라버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체에 흠이 있는 이 병자였다. 전통에 의하면 신체에 흠이 있는 사람은 제단과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겨우 회당 출입 정도만 허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허용된들,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는 존재, 함께 있지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닌 유령 같은 존재였다. 있으나 없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였는데 성경은 그 존재가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바로 앞 두 구절에서 의도적으로 '사람'이라는 같은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이 사람의 출현을 예고하였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많은 사람이 모인 회당에 나와 있으면서도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긴 손 마른 한 사람, 우리 앞에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그런 사람의 문제를 성경은 제기하고 있다.
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적대자들이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치유하면 이를 빌미로 그를 고발하려고 두 눈 부릅뜨고 주시하였다. 그들 중에 서기관이라는 집단들이 있었다. 이들은 '토라'를 읽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예수 당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을 넘어 재판 과정과 판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예수가 바알세불 귀신에 들렸다고 비난했었고 예수 체포를 위해 사람들을 투입했으며 그를 직접 심문하고 사형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민 데다가,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 아래서 예수를 조롱했던 집단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지금 한쪽 손이 마른 사람에게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오직 예수가 법을 어기는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들에게 그 병들고 지친 사람은 단지 자기들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었다.
예수는 바로 그 한 손이 말라버린 사람에게 ‘일어나세요! 그리고 여기 가운데로 오세요’라고 말하였다. 한글 성경들은 이 구절을 '일어서라' ’일어나서 나오너라‘ 등 다소 권위적이고 단호한 어투로 번역하였지만 말라버린 손을 숨긴 채 회당 한쪽에 숨죽여 앉아 있던 그를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을 고려한다면 "일어나세요"와 같은 따뜻한 느낌의 번역이 더 어울린다. 회당 한 귀퉁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 사람에 대한 '격려'와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누리는 일상 공간으로의 '초대'가 담긴 말투로 말이다. 예수의 이 격려와 초대는 그 병자에게 죄가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미 예수는 정결법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되는 막2장에서 한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병자를 죄인으로 몰아갔던 모든 정결법의 정죄로부터 해방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2. 사랑이 없는 법질서에서
하지만 예수의 그런 말들이 서기관들에게는 당시 사회와 율법 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말로 들렸으니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신성모독의 죄인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개역 개정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번역하였지만 '옳다'라는 말보다 '당연하다'라는 말이 원래의 뜻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기보다 '당연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이 일마저 공격 거리로 삼는 그들에게 예수는 분노하였다. 그래서 질문을 몰아쳤다. 하지만 그 질문에 그들은 침묵하였다. 너무도 쉬운 질문이지만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다.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기만 하면 그를 잡아넣을 수 있었기에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질문에 대한 침묵은 한쪽 손이 마른 그 사람에 대한 침묵이기 하였다. 그들 안중에는 손 마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법과 질서와 상식을 논하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법과 질서와 상식은 그 한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한 사람을 향하지 않는 법과 질서와 상식은 모두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정의와 정결을 흉내 내면서 거룩의 탈을 쓴 종교 사기꾼들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버렸다'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는 분노를 넘어 서글펐다. 그들의 굳어버린 마음, 스스로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뒤틀려버린 인간성 손상과 악함에 마주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예수는 그 사람을 고쳤다. 고치기만 하면 그것을 빌미로 잡아넣으려 적대자들이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 그 위험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안중에는 '그 한 사람'만 보였던 것이다.
예수는 질병과 단절로 고통받는 그 한 사람도 하나님의 소중한 영혼, 사랑받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안식일에 선이 아니라 악을 행해서라도,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여서라도 그것이 옳다고 침묵으로 강변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의 치유를 잠시도 미루실 수가 없었다. 사실, 그 일을 위해서 오신 당신임을 알려야 했다. 그것도 호시탐탐 약점을 잡으려는 이들 앞에서, 일말의 빌미로 없는 죄까지 만들려는 이들 앞에서 말이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평소에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에 있었고 피차 이해관계를 달리했던 부류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살렸다는 이유 하나로 이들이 연대하였다. 병들고 지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은 법과 질서와 상식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짓을 하였다 하여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 눈에는 곤궁에 처한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3. 사람이 곧 성전이거늘
이스라엘은 지중해로부터 서풍이 분다. 그래서 예루살렘 동쪽 기드론 골짜기 인근과 감람산 비탈에는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부정해짐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유전 <미드라시>에는 바람이 불 때 문둥병자의 동쪽으로는 약 2미터 이내,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약 50미터 이내로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무서운 그 시대에 예수는 체포 전 마지막으로 베다니에 머무셨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 비탈에 있는 묘지들을 지나서도 더 동쪽의 감람산 기슭에 위치하였다. 그곳은 나병자들과 유출병자들의 수용소가 있는 장소였다. 예루살렘으로 부는 지중해의 서풍 때문에 무덤과 부정한 것들이 그 동쪽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예루살렘의 동쪽은 변방의 변방, 저주받은 땅이었다. 나사로, 나병 환자 시몬 등 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격리되어야 했던 이들이 거기 살았다.
그 그 베다니가 있던 감람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예수는 체포되기 직전에 거기서 그 아름다운 성전을 보셨다. 거룩한 것에서 분리되어 부정하다 여겨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베다니에서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도성과 그 안에 있는 화려한 성전을 마주 보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는 처형되기 전, 가룟 유다의 그 배신 날에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던가?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셨다."(막14:3) 잡히시던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가난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부정하다 여겨진 나병 환자의 집에서 함께 식사하셨던 것이다. 멀리 지중해에서 불러오는 바람에도 오염될까 두려워 무덤보다 더 동쪽으로 쫓겨나 살던 나병환자의 마을 베다니, 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소위 '죄인'이라 불린 그들과 함께 식사한 그 시몬 집이 실상 거룩한 성전이었다.
예수가 계신 곳, 그곳이 성전이다. 그래서 정결법과 맞서 온 예수가 운명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막15:38). 천년이나 지탱해온 이스라엘의 성전 체제와 정결법이 예수의 죽음으로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의 무지와 두려움을 숙주 삼아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리해 왔던 것들이, 의인과 죄인을 분리했던 것들이, 가난하고 병들고 장애 입은 사람들을 '정죄'하던 정결법이 성전과 함께 무너졌다. 대신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말씀하셨던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나 우리의 새 성전이 되었다. 그 이후로 그 주님이 계신 곳이 우리에게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요 참 성전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 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막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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