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24. 00:4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 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16~30)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한 부자 청년이 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나요?’ 하고 물었다. 그때 예수는 그 부자에게 일단 ‘율법을 다 지켜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념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그 전통대로 율법을 일단 율법을 다 지켜보라는 말이었다. 예수는 정말 그 청년이 율법을 다 지킬 능력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일까?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런 자신만만한 부자 청년에게 ‘정말? 그럼 가서 율법을 다 지켜봐라,, 그것이 가능할까?’ 즉, 사람의 능력과 수고로는 율법 완수가 어렵다는 반어적 말씀이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율법을 다 행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행했다고 말하는 이 부자 청년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나오는 ‘아침 일찍부터 일하여’ '자기 수고를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영생에 대한 그의 오해와 무지, 그리고 오만한 대답에 예수는 의미로 한 마디를 던지셨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 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러자 그는 근심하며 집으로 가 버렸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세상 모든 사람은 부자이다. 부자는 재물 많음만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명예, 성공, 업적, 자아 확대’에 성공했거나 상당한 사람들은 모두 부자이다. 여기의 부자 청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자기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행했다는 자기 의, 자기 수고가 많았으니 그것으로 그는 <부자>인 것이다. 세상에는 물질의 부자를 넘어 자아 확대와 자기 성취의 부자들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부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 부자는 저주받을 부자이다. 예수를 찾아왔던 부자 청년이 자기의 가진 것, 쌓아 온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떠남으로써 결국 영원한 생명을 포기해야 했으니 말이다. 실상, 그는 열심히 살아 ‘나’라는 자아 구축에 성공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만족하고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위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저주받은 자일 가능성이 크다. 가진 것이 많으니 그것을 포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예 없는 사람은 쉽게 다 버릴 수 있다. 부자는 인간의 자기 가치와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생들이다. 이런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 은혜 앞에서 엎드리기 힘들다.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이 많고 나를 위해 구축해 놓은 것이 많은데 그것들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라니? 그런 예수, 그런 신앙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기부정이 어려운 인생들
어쩌면, 그래서 예수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비유하셨을 것이다. 이 비유는 돈 많은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뜻만이 아니다. 여기서 ‘부자’란 ‘나’라는 존재의 구축을 위해, 자아 확대를 위해, 자기 자존심 세우고자 속물 것들로 치장하여 비대해지고 오염된 아담의 후손들을 말한다. 예수는 그런 인생들을 ‘낙타’에 비유하셨다. 낙타는 당시 유대인들이 부리던 가축 중 가장 큰 동물이었다. 율법 아래 살아가는 아담들 모습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자아실현, 자아 확장, 자기 체면, 위신, 업적 쌓기를 위해서 매진하는 인생들이 어느사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져 낙타처럼 커져버렸다. 가장 커졌으니니 낙타라는 말이다. 그런 인생들에게 천국 문은 바늘귀만큼 좁다. 낙타 같은 부자로는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
복음은 십자가이다. 거기서 내가 죽어 나를 부인함이다. 낙타처럼 비대해진 내 자아를 잘게 부수어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티끌로 만들어 감이다. 바울이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함도 자신이 티끌, 먼지의 자리로 내려가기를 원하나 뜻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한 말이었다. 그렇게 낮아지고 갈리어 먼지가 된 인생이 바늘귀를 통과해서 천국에 이른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복음은 이전에 나를 위해 쌓고 구축해왔던 모든 것들을 부순다. 낙타인 나, 부자인 나를 다이어트시키는 것이다. 얼마만큼이나 부수어 갈까?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까지이다. 하나님은 작고 가늘어질 때까지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매일매일 십자가에 못 박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 자기 부인과 부정이 내 힘으로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가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우리 스스로는, 내 힘으로는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해 주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 우리의 ‘낙타’가 예수로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부정되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바늘귀를 통과할 수 있는 ‘티끌’로 만들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방식은 십자가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대가가 아니었다.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와 일했다고,, 어려서부터 계명을 착실히 지켰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대감과 보상 심리
신앙생활로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율법주의, 바리새적 사고, 인습적 습관들을 떨치지 못할 때가 많다. 모태 신앙이라고, 교회봉사, 건축한금, 선교활동 등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며 은근히 보상이나 축복을 기대하는 심리를 당연한 믿음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헌신했으니, 인생을 투자했으니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는 심리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갚아주신다. 이 땅에서 안 갚아주시면 저 세상에서라도 공의롭게 다 갚아주신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이 갚고 보상해 주어야 할 마땅한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세상 복을 달라고, 몇 배로 갚아 달라고 요구하여 기도한다면 부자 청년과 다를 바 없다. 아침 일찍 와서 일했다는 이유로 더 달라고 불평하는 포도원 품꾼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인생들에 대한 예수의 결론은 한결같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리라’
성도로 사는 우리의 실제 보상은 십자가이고 구원이며 영생이다. 우리들은 이미 그것으로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을 안 받은 것처럼 다른 것들을 달라고 자꾸 요구하고 기도함은 십자가를 붙들지 않고 자기 정의를 붙들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베드로나 부자 청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부자 청년이 가진 것이 많았다면 베드로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자 청년과 대척점에 서 있으니 자기는 큰 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19:27) 베드로가 다 버림은 뭘 위해서였던가? 자신에게 주어질 보상을 위해 다 버렸다. 그러니 자기를 위한 부자 청년이나 자기를 위하는 베드로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부자처럼 자아 확장을 위해 모으고 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베드로처럼 자아 확장을 위해 다 버리는 종교가와 수행자들도 있다. 자기라는 존재의 선함과 고상함을 증명하고자 ‘무소유’까지 끌어다 스스로를 치장하는 본성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십자가’이지 ‘무소유’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역시 ‘부자’라 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는 빈자였지만 자기를 구축하고 자아를 확장하여 높이려는 점에서 부자 청년과 똑같이 ‘부자’였던 셈이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영생을 추구함이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아 자기를 확장함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깨어지고 죽고 다시 살아 궁극에 영생을 오늘 누림에 있다. 우리는 부동산을 아까워 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나 부모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산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으니 십자가를 믿고 구원된 존재로의 삶이야말로 진짜 부자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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