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기로에서

2022. 2. 23. 01:21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포로 된 야곱의 장막들을 돌이키고 그 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길 것이라. 그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요 그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그중에서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케 하리니 쇠잔치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영화롭게 하리니 비천하지 아니하겠으며 그 자손은 여전하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그 왕은 그 본족에게서 날 것이요 그 통치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며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 하므로 그가 내게 접근하리라. 그렇지 않고 담대히 내게 접근할 자가 누구뇨?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렘30:18-22)

 

2년이 넘도록 괴롭혀 온 코로나 역병이 바야흐로 진정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하다. 이제 일상 회복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대해 본다. 일상으로의 회복, 그 회복을 꿈꾸었던 오래전 민족이 있었다. 그 민족의 희망을 노래했던 예레미야서의 주제는 '회복'이다.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와 일상의 행복을 회복하는 것이 예레미야가 꿈꾸던 복이었다. 옛날과 같이 그들이 다시 회복됨이 바로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회복인가?

신앙 안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의 회복은 그냥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감인가? 아니다. 단순한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 과거는 어떤 과거였던가?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울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내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렘2:7-8). 그 과거는 이미 심판받았다. 선지자가 말하는 회복은 상처 입은 포로들을 치료함이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옴이며 거기서 새롭게 하늘 시민으로 약속된 미래를 시작함이었다. 과거 실패를 딛고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로 다시 도전함이었다. 이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의 모험이고 도전이며 출발인 것이다.

 

사막에 은거하는 이름난 한 수도자가 있었다. 종교적 경건을 추구코자 속세를 떠나 외진 곳에 살며 도를 닦는 사람이었다. 어찌 알았는지 사람들이 이 수도자를 찾아왔다. 그리고 물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수도자는 한참 먼 산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칠일, 저기 보이는 산으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산을 움직여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소."." 그날이 되자 많은 군중이 몰려와 수도자가 산을 움직이길 기다렸다. 산 앞에서 고요히 기도를 마친 수도자가 이윽고 산을 향해 소리쳤다. "산아, 움직여라!" 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수도자가 다시 외쳤다. "산아, 움직여라!" 산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던 군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수도자는 다시 산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산아, 내게로 오라!" 그래도 산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수도자가 한참 동안 산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네게로 가면 되지, !" 웅성대는 군중 사이를 헤치고 수도자는 산을 향해 떠났다. -어느 시인의 산에 대한 우화 중 일부 내용이다.

 

수도자는 정말 산이 움직여 자기한테 온다고 생각했을까? 이 우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무엇이든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으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것을 향해 떠나라! 수도자는 믿음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음을 향해 떠나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다림을 그냥 막연히 기다리는 것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다림에도 능동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는 것에서 얻는 것도 있겠지만 능동적으로 내가 나서고 행하여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람개비는 바람이 불지 않으면 돌지 않는다. 그럴 때는 내가 앞으로 달려가면 된다.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길을 가고자 하는 자에게 길이 만들어지는 이치와 같다. 내가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으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내가 그 기다림을 찾아가면 된다는 이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진리이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모험이다.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고도의 모험이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이 모험을 감행하셨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모험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1:14). 신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은 하나님의 거대한 모험이었다. 전능하신 분이 다른 모든 아기들처럼 먹을 것을 받아먹어야 했고 기저귀를 차야 했으며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워서 빤히 엄마를 바라보며 꼼지락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아이로 이 땅에 오셨다. 인간을 지으신 분이 인간이 되는 위험을 감수하셨던 것이다. 사탄을 만드신 분이 그 사탄의 시험을 받는 존재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셨다. 왜 하나님이 이런 위험들을 감수하시고 모험을 감행하셨는가? 우리를 위해, 사랑을 위해, 생명을 위해, 언약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위험 감수를 기피한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웃는 것은 바보처럼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우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일에 휘말리는 위험을 /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꿈을 사람들 앞에서 밝히는 것은 순진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랑을 보상받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사는 것은 죽은 위험을/ 희망을 갖는 것은 절망하는 위험을/ 시도하는 것은 실패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그러나 위험은 감수해야만 하는 것/ 삶에서 가장 큰 위험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것이기에/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하므로/ 고통과 슬픔은 피할 수 있을 것이나/ 배움을 얻을 수도, 느낄 수도, 변화할 수도/ 성장하거나 사랑할 수도 없으므로/ 확실한 것에만 묶여 있는 사람은/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다/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만이/ 오직/ 진정으로 자유롭다." 자넷 랜드의 시 <위험들>의 내용이다. 

 

실패가 두렵겠지만 믿음은 위험을 감수함이다.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이미 우리는 여러 번 실패했었다. 처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넘어졌었고, 처음 수영을 배웠을 때 물에 빠졌었다. 홈런을 가장 많이 치는 강타자가 자주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지 않던가! 코로나를 불러온 우리의 과거는 실패한 과거였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실패가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아 놓치는 기회들이다. 문이 닫혔다고 실망하는 사람들, 다른 쪽 문을 찾아보기를 두려워하는 인생들. 그런 이들은 부단히 변하는 것들 사이에서 열정을 다해 사는 이들의 희열을 알지 못한다, 언제나 그렇듯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길에 눈이 쌓여 있어도 눈을 밟으며 길을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 인생들에게 눈밭을 혼자 걷는 용기는 불가능하다. 과거의 익숙했던 것에서 떠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익숙함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과일상자에서 상한 과일들을 골라내다 보면 대개의 상처가 과일끼리 서로 맞닿은 부분에서 생겨남을 알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처를 주고 입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가족과 친구, 교우와 동료들은 사실,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는 관계의 익숙함에 무감각해져 그 소중함을 잃고 뒷날 후회하는 경우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다하라>는 말이 있나 보다.. 운전이 가장 위험해지는 때는 초보를 벗어나 이제 막 운전이 익숙해지는 때라고 한다. 운전에 자신이 생기는 순간이 사고 날 확률이 가장 높은 순간임을 경력자들은 다 안다. 운전만 그렇겠는가? 삶도 익숙해지면 자기 확신이 강화되고 그 확신하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 우리 삶의 대부분 위기들은 이런 익숙함이라는 함정에서 비릇되었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어느 사이 코로나에도 익숙해진 것 같다. 그렇게 불편하던 마스크 착용도 이제는 익숙해져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오히려 어색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처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익숙해진 것 중에 하나가 온라인 예배이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온라인 예배가 그 선호도나 참여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분명,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이다. 하지만 처음의 어색함이 익숙함으로 변하고 익숙함이 편리함으로 변할 때 거기서 파생될 자의적 신앙은 미숙한 운전자의 과속만큼이나 위험하다. 신앙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익숙해짐이 아니라 성숙해져야 하는 사안이기에 걱정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교회를 두심은 각 개인의 영적 성장과 인격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끝난 후에도 온라인 문화에 익숙해져 교제도 나눔도 없는 개인적 신앙, 편의적 예배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익숙함이 관계의 소중함, 연대의 중요성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 이시오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5-20). 하나님이 생명과 사망복과 저주의 두 길을 두셨다. 그리고는 우리만이 아니라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라하셨다. 생명을 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모험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셨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기때문이다. 나와 내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을 선택해야 하잖겠는가

 

결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땅에 은혜를 베풀어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듯이 오늘의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다. 그러니 우리가 이 생명과 복의 길로 나아가자. 우리 주와 맺은 언약이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 늘 보호하시겠다 하신다. 그러니 그 주님을 찬송하면서 우리 앞길 멀고 험해도 주님만 따라가 보자. 그래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 그들 가운데 하늘빛을 내자. 세상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의 기쁜 이름이 되고 찬송과 영광이 되어 보자는 말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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