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들의 기도

2022. 2. 22. 13:4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6:25-29)

 

종종 대형서점 기독도서 베스트셀러 코너를 둘러보면 기도에 관한 책들이 많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강청 기도의 능력’ ‘응답받는 기도’ ‘영으로 하는 기도, 소원에 대한 간절함, 하나님을 흔들어서라도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이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한 제목들이다. 정말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 있을까?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에 이미 완성되었다.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고 다 아시는 분이 어떤 것을 계획하시셨다면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 중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 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하늘에서 이미 그분의 계획과 목적은 이루어졌다.

 

다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시공간적 현장이 나의 삶이고 우리들의 역사이다. 내가 졸서라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전지 하지 않고 전능할 수도 없다. 사람의 요구에 조변석개하는 하나님이 어찌 전지전능한 신이겠는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이들, 산기도로 나무뿌리를 뽑을 만큼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아 당신 뜻을 돌이켜 응답한다고 믿는 이들, 정말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가 가능할까?

 

1. 기도의 진정한 의미

하나님이 은혜를 허락하는 수단에는 세 가지가 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예배)이다. 그런데 그 세 가지 은혜의 수단 중 하나인 기도가 엉뚱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팔다리가 있으니 이는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주신 신체 일부들이다. 그러나 그 팔 다리가 미숙한 아기에게는 도리어 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 멋모르고 난로를 만져서 데기도 하고 위험물을 향해 돌진하기도 하니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같은 이치로, 하나님이 유익으로 주신 기도가 오남용이 된다면 오히려 신앙생활에 해가 될 수도 있다. 우리 죽었던 영이 은혜로 살아나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순간부터 사단의 공격은 시작된다. 그 공격에 대처하며 하늘 사람들이 이 땅을 살아갈 유일한 방법이 기도이다.

 

기도는 세상 힘에서 돌이켜 하늘 힘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의 소원성취 도구가 아니다. 사단은 오래전부터기도를 왜곡시켜왔다. 우리로 자기 욕심과 필요를 구하는 수단으로, 세상 힘과 사람들의 지지를 구하는 것에 사용토록 하였다. 실제로 사단은 그러한 기도에 응답할 능력도 있다. 그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라”(눅4:6). 종종 그런 기도에 응답하여 기도라는 강력한 영적 무기를 부질없는 것 구하는 것에 쓰이도록 곡해시켜 온 것이다. 그리하여 마술사나 요술램프처럼 우리가 요구할 때마다 들어주어야 하는 채무자나 해결사로 하나님을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6:25-29).  분명, 하나님은 우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 하셨다. 우리의 구할 바는 하나님 나라와 의이니 우리 필요한 것은 알아서 더 하시겠다 하였다. 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하였다. 내일 일은 내일이 맡아서 하게 두라는 말이다. 두 번째 내일이 부사가 아니라 주어’인 것이다. , 내일 일은 내일을 주관하시는 그분께서 하시니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하셨다.

 

2.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그러면 우리가 구할 그 하나님 나라와 의는 무엇일까? 바울의 글에서 그 단서를 읽을 수 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골로새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는 그들의 물질적 필요가 아닌 그들의 성숙을 위함이었다. 하늘 시민으로 자라 갈 수 있도록, 그래서 세상에서 성도로서 살아감을 견디도록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이었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 우리 필요를 하나님께 전혀 구할 필요는 없는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당연히 자녀들은 그 필요를 아버지께 구해야 한다. 기도는 그분의 자녀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자녀인 내가 아버지인 하나님에게 부탁하고 요구할 수 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형식이나 특별한 시간을 넘어 수시로 아이가 아버지에게 조르듯 아버지와 대화함이 정상적인 기도 생활이다. 물론, 그렇게 기도함에도 실패하고 고통에 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 그 고통을 겪으면서 아버지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이 기도이다.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는 기도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는 자녀의 필요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천지의 주관자가 나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하셨다. 자녀가 요구한 것을 주었을 때 그것이 해가 될지 득이 될지도 알기에 원한다고 다 들어주시지 않는다. 더구나 하늘 자녀로 만들어 감에 불필요한 것은 절대 주시지 않는다. 그 의중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거기에 필요한 것이 기도생활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당신의 자녀들이 현실에서 소원을 만사형통으로 이루고 일시적인 이 땅 삶에 뿌리박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아버지는 자녀가 당신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나그네로 사는 이 세상에서 점차 미련두지 않게 만들어 가신다.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아버지 집에 관심을 잃도록 방치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들이 신을 향하여 추구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내 욕심과 내 편의에 기인한 요구들이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내 정욕으로 구하는 것들을 들어 주실 수가 없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탐내어도 가지지 못하면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다가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약4:2-3).

 

3. 굳이 기도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을 왜 기도하라 하나? 물론, 하나님은 당신께서 계획하신 당신의 일을 하신다. 그 계획하신 일은 우리 요구로 바뀌지 않고 바꿔질 수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 수단으로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신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 있다. 왜 그렇게 하실까?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럴 일은 없다. 하나님은 실패할 수 없는 전지전능 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두느라 하늘 뜻과 일에 무관심해지면 하나님은 반드시 채찍을 드신다. 하늘 자녀의 영성을 위한 교육이다. 그 징계로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기도의 중요성을 반복하고 강조하심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감을 보며 하늘의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자발적 기도의 깊은 자리를 점차 사모하여 간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신앙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성숙해져 간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는가가 바른 기도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응답을 받았고 필요한 것을 얻어냈는가는 기도의 바른 척도가 아니요 또한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 없음이 정상일 수도 있다. 우리가 구원받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기에 오늘에 구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었고 사막에서는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주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지만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다.”(시106:14-15)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엉뚱한 것들을 많이 구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주셨다. 하지만 성서 시인은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것 받음이 그들 영혼의 파리한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보았다. 사실이다. 우리가 요구한 것을 받음이 우리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내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보다 하나님 일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내가 이제 대화하는 관계임이 본질이다. 그러니 삶에서 내 요구한 것이 이뤄지고 안 이뤄지고는 문제가 아니다. 거룩하신 분 앞에서 죽을 운명이었던 내가 이제 그의 자녀가 되어 직접 대면하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 그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허공에 날리는 기도가 아니라 듣는 대상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실존하는 누군가가 나의 말을 들으심이 전제된 것, 그것이 기도이다.

 

결론

너희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16:23-24) 구하지 않게 될 것이라면서 또 무언가를 구하라는 이 말씀에는 구하지 말 것과 구해야 할 것이 있다는 말이다. 구하지 말 것은 세상의 힘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이들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랑하려고 , 성공, 권력, 인기, 명예를 구하고 추구한. 반면에 구해야 할 것은 하늘 자녀로서의 삶의 원리이다. 내려놓는 삶, 거룩한 삶에로의 전진과 성숙, 그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구하는 것, 예수라면 아버지께 어떤 내용으로 기도 하셨을까를 생각하며 기도하라는 말이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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