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4. 00:4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창1:14‐23)
선거 시즌이 다가오니 사람들 사이에서 요상한 말들이 난무한다. 어느 후보와 관련된 점쟁이, 무당, 선사, 법사 등 무속인들의 관여와 거취가 연일 화제몰이를 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상식을 넘어서는 이야기들, 기적이나 주술 같은 이야기들에 저리도 관심이 많을까? 불안한 세상을 살다 보니 그럴게다. 불학실한 시절을 살다보니 그럴게다. 하지만 불안하고 불확실할수록 더 더욱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게서 상식과 편안을 찾아야 한다. 신앙으로 사는 이들은 태양과 달과 별,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운행되고 지속되는 계절과 낮과 밤이라는 창조 기사에서 상식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기 때문이다.
1. 보이지 않는 주관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1‐4) 하나님이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들어 낮과 밤을 우리에게 주심은 그 낮과 밤으로 하여금 지식을 전하게 하심이라 하였다. 그 지식은 <세상이 우연히 움직여짐이 아니라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지식이다. 그러니 영으로 사는 사람은 변함없이 오고 가는 낮과 밤, 태양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주관하고 계시다는 지식을 얻는다.
시인은 그 지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시8:3‐4)라고 노래하였다. 낮의 태양과 밤의 달, 별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 속에 배어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감사로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 삶은 이 정서에서 너무도 멀고 이 서정을 느끼기에는 너무도 각박하다. 이기기 위해서 달려야 하고 성공하기 위해 조금의 여유도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마귀가 우리를 그렇게 바쁘게 만드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들도 많이 만들어 우리 마음을 그것들에 몰두케 한다. 그래서 천지 만물에 흐르는 하나님의 능력과 질서를 놓치게 만든다.
태양과 달과 별들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명령하신 빛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이 땅에도 빛으로 창조된 사람들이 있다. 하늘이 자녀, 신자들이다. 빛으로 부름을 받아 빛 된 삶을 명령받은 이들은 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보면서 혹 나태한 삶을 산다면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은 넷째 날의 하늘 광명들 창조를 통해 당신께서 이 역사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보이셨다. 이미 첫날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세상을 주관하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빛을 창조하셨다. 만물은 그 빛에 의해 주관되고 운행되며 움직인다. 태양이 없어도 밤과 낮이 이미 있었고 해가 없음에도 식물들이 자라났었다. 만물의 생존과 자연법칙은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인 보이지 않는 빛에 의해 주관되었다.
2. 여전히 창조하시는 분
그렇다면 굳이 태양이 없어도 되는데 왜 하나님은 굳이 이 역사와 공간에 그 빛의 대리자로 태양과 달과 별을 세우셨을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빛은 그 태양 배후에서 일하신다. 이것이 창조 넷째 날의 메시지로써 이는 우리를 향한 배려였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법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태양을 만드신 것이다. 신자는 그 태양의 작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지금 일하고 계심’을 믿는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보이는 형상과 현상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신자는 나타난 형상인 태양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읽는 것이다.
‘의술’을 한 예로 들어 본다. ‘의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형으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계획이 있고 또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신다는 현상이다. 보이지 않는 빛의 사역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태양 같은 역할을 ‘의학’과 ‘의사’가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가 질병에 걸리면 병원을 가고 의사에게 치료를 받음은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치료가 의사를 통해, 약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니 그 치료는 뒤에서 보이지 않는 빛인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요상한 신앙관을 가진 이들은 아플 때 기도원 가서 병이 나으면 하나님이 고쳐주셨다 하여 그 사람의 믿음을 높이는 반면, 병원을 가서 병이 나으면 믿음이 없어 ‘의술’에나 의존한 사람이라 치부해 버린다. 이는 성경을 모르는 무지와 오해에서 비릇된 것이다. 사실, 이런 풍토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특히 종교 문화, 교회 문화에서 더 심하다. 무엇보다 창1:2의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은 새 창조가 완성이 될 때까지 암탉이 알을 품듯이 만물을 품어 계속 창조 사역을 진행하신다.
그러니 이 순간에도 창조가 일어나고 있다. 아기들이 태어나고 예술작들이 탄생하며 과학 성과들이 나타나니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품으심으로 진행되는 새 창조들이다.. 그 창조 사역에 하나님은 우리를 동참시키셨다. 빵나무를 주시지 않고 밀을 심어 추수를 하게 하시고 밀가루를 만들어 반죽을 하게 하시며 적당한 불에 적당하게 구워 빵을 만들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5:14)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여 병에 걸리면 무조건 모여 기도하였다. 기도만으로 모든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기 ’기름을 바르며‘는 당시의 의술이었다. 고대에는 환자 환부에 기름을 문지르는 의술이 일반적이었다. 병든 사람에게 모여서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의술을 의지하여 치료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인 것이다.
3. 신비보다 상식으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로 흐르면 위험하다. 하나님의 영광 빛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모든 것을 유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태양을 세워 그 뒤에서 일하신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연법칙을 거슬러 일하지 않는다. 물론, 구원과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자연 법칙을 거슬러 일할 때도 있었다. 구원의 비밀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태양을 뒤로 가게도 하였고 지구 자전을 멈추게도 하였으며 만유인력 법칙을 잠시 물리고 물 위를 걷게도 하셨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구원의 이치, 또는 하늘 비밀을 설명할 때에 한하였다. 그 외에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조차도 철저하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연법칙에 순응하였다. 그 역시 배가 고프면 먹어야 했고 몸이 피곤하면 주무셔야 했다. 오늘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병자들을 기적처럼 신비하게 고치실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태양을 통해서 빛의 일을 하신다.
그렇듯,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의술과 의약품들을 통해서 병을 고치신다. 손창호라는 오래전 탤런트, 그분이 이혼 후에 서울역에서 신부전증을 앓는 노숙자로 발견되었다. 병이 위중해서 시에서 가톨릭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지속적으로 투석하며 치료하던 어느 날 그가 병원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유인 즉, 병원에 잘 있는 그분을 어떤 기도원장이 찾아와 자기 기도원에서 기도하면 금방 낫는다고 유혹하여 데려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체로 돌려보내진 것이다. 정말 무지하고 미련한 짓이었다. 유방암에 걸린 어떤 집사님에게 기도깨나 하신다는 어떤 권사님이 절대 병원에 가지 말고 기도로 고치라고 권한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우리들 주변에 정말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고 또 그런 소리에 솔깃하는 이상한(?) 신앙인들도 많다. 현실이 그렇다.
이상한 것을 믿지 말고 또 그 이상한 이야기들에 흔들리지 말라. 하나님은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고는 특이하게 그것들을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 칭하였다. 왜 그랬을까? 태양은 애급을 나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가장 열심히 섬겼던 신이었다. 달은 장차 이스라엘리 들어가 살 땅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여신이었다. 출애굽 한 그들, 즉 이제 신앙으로 살 이들에게 지금껏 섬기던 그 일월성신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만든 크고 작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리고자 굳이 해와 달을 ’하나님이 만드신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그 새 창조가 오늘의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성전인 우리를 충만히 채워가는 것이다. 무엇으로? 성령으로 채워가신다. 속물로 살아왔던 삶을 성령으로 채우지 않은 채 비어 있으면 일곱 귀신이 들어온다는 복음서 이야기를 기억하자. 그러니 채워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야 한다. 무엇이 성령 충만인가? 하늘의 원리로 사는 삶이 성령 충만함이다.
결론
첫 창조를 멋지게 끝내고 안식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나로 시작된 새 창조도 완성해 가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인격이 나의 인격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는 성령 충만한 성전으로 나를 완성해 가신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어 하늘 삶의 원리를 이 세상 삶에서 연습하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며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일이 하늘 일이 되어야 하고 나 삶이 하늘 삶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푸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풀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매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도 매이는 것이다. 신자의 삶은 바로 그 지점에서 지금도 이 땅에서 창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조는 반드시 완성된다. 그러니 피곤하여 힘 빠진 무릎을 세워 다시 달려보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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