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3. 21:5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창1:9~13)
신자가 신자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 같지 않으니 세상의 걱정이 크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고 기도해 주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에 근심거리가 되어버렸다. 섞여버림은 혼돈이요 혼돈은 정체성을 상실케 한다. 신자가 신자답지 못함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도 그 정체성이 섞여버렸거나 혹은 상실했기 때문이다. 갈라야 한다. 그래서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애당초 하나님은 물과 뭍을 나누었다. 온통 물로 덮여 있던 지구에 땅을 융기시켜 땅과 바다로 나뉘게 한 것이다. 셋째 날 이전까지 원래의 지구는 온통 물로 덮여 있었다.
1. 하나님이 가르시다
성경은 땅의 기초를 바다라고 말한다. (시24:1‐2)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주의 것, 온 누리와 거기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도 주의 것, 분명 주께서 그 기초를 바다 밑에 놓으셨고 강바닥에 단단히 세우셨도다.” 온통 바다였던 지구에 땅을 솟게 만들어 땅과 바다를 가르고 그 경계도 정해주셨다. 지질학자들은 원래 땅과 바다가 지금처럼 오대양 육대주로 갈라진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땅은 하나로 뭉쳐있었고 바다는 그 땅 둘레를 감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각 대변동으로 오늘처럼 땅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오대양 육대주를 컴퓨터로 모아 보면 정확하게 하나로 맞춰진다. 남아프리카 해안과 남아메리카 대륙 해안을 붙여 보면 퍼즐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다.
그렇게 셋째 날에 땅과 바다가 나누어졌다. 땅과 바다의 그 구분은 대강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다는 전체 지표면의 71%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바다와 땅의 비율은 정확히 7:3이다. 혹, 바다의 비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거나 늘어나면 땅은 온갖 과실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지금보다 바다 비율이 늘어나면 수증기가 지나치게 늘어나 지구는 습지로 변한다. 그렇다고 바다 비율이 지금보다 줄어들게 되면 수증기 양이 줄어들어 지구는 사막으로 변한다. 이렇듯 지구 상에서 동식물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바다와 땅의 정확한 비율이 7:3이다. 이 비율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정확하게 지켜지고 있다. 혹, 하나님께서 그 비율을 조금만 건드리면 그날부터 지구는 멸망이다.
그런데 이미 그 망조가 나타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빙하가 녹으면서 바다가 차지하는 지표면 비율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이다. 지구는 태양 빛을 받아서 10%를 저장하고 90%를 적외선으로 방출한다. 그런데 탄산 가스층이 지구를 덮으면서 적외선이 대기권 안에 자꾸 갇히니 온난화 현상이 초래되었다. 그 결과 빙하가 녹고 바다의 지표면 점유 비율이 높아지면서 세계 곳곳에 홍수가 나고 있고 어떤 지역에는 극한 가뭄이 발생한다. 이 현상들은 인간들이 쌓아 온 문명의 바벨탑 열매들이다. 인간의 탐욕과 죄가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해 온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생존하기에 가장 적당한 양의 물을 바다로 주셨다. 지표면 점유 비율도 정확하게 7:3으로 나누어 주셨다. 그 황금 비율이 인간의 편의와 이기심 충족으로 무너지고 있다.
2. 신비한 그 창조를 보라
인체의 구조를 공부해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그 인간의 신체라는 것이 얼마나 기기묘묘하게 만들어졌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라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와 배려에 경외심이 절로 솟는다. 1,000조 개의 분자로 구성된 70조 개의 세포가 모여 인간이란 생명체를 이룬다. 그 70조 개 세포가 각기 먹고 마시고 소화하며 배설하는 수 만 가지 신진대사를 한다. 밖에서 음식이 들어오면 소화기와 내장에서 그것을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도 신묘막측하기만 하다. 위, 소장, 대장, 간, 신장, 췌장 어느 것 하나도 빈틈이 없이 설계되어 있다. 각기 정확한 설계도에 의해 지어진 공장처럼 각기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각자 분담된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산소를 공급하고 독소를 정화하며 고장 난 부분을 자가 치료한다.. 외부로부터 손상받을만한 중요한 척수와 뇌, 내장은 든든한 뼈로 싸여있다.
이는 마치 어떤 공장을 돌리기 위해 70조 명의 인부들이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듯 우리 몸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잠시 그 일을 멈추면 우리 몸은 큰일이 난다. 이렇듯 하나님은 최고의 창조물인 인간을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늘과 바다와 땅의 틀을 마련해 주셨으며 먹거리까지 준비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 인간 몸을 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구조로 창조해 주셨다. 그리고 당신의 사람들이 당신의 원하신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세상과 우주와 역사에 세심하게 간섭하신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 이런 창조를 제대로 알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받아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기 문제에 갇혀 천지 만물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외면하고 있다. “쏟아진 폭우가 시내가 되어서 흐르도록 개울을 낸 이가 누구냐? 천둥과 번개가 가는 길을 낸 이가 누구냐?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메마른 거친 땅을 적시며 굳은 땅에서 풀이 돋아나게 하는 이가 누구냐?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방울을 낳기라도 하였느냐? 얼음은 어느 모태에서 나왔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을 돌같이 굳게 얼리는 이, 바다의 수면도 얼게 하는 이가 누구냐?”(욥38:25‐30) 그렇다. 살펴보라. 어느 것 하나 우리의 수고로 되는 것이 없다. 생명체가 존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하나님이 모두 해 놓으셨셨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그 은혜를 그저 관망하고 스쳐 지나듯이 듣는다.
3. 섞임과 혼돈은 저주이다
성경에서 ‘뭍‘과 ’바다‘가 대조되어 나오면, 항시 ’뭍‘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바다‘는 죄된 세상을 상징해왔다. 다섯째 날 만들어진 바닷속 생물 중에 ’타닌‘이 있었다. 창1:21의 ’큰 물고기‘로 번역된 ’타닌‘은 ’용, 뱀, 바다, 괴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이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남'으로 묘사하곤 하였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타닌)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51:9‐10)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며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양 같이 뛰었도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시104:2‐5)
이 구절들의 배경은 홍해가 마르고 요단이 갈라진 사건이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출14:21)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3:17) 두 곳 모두에서 성경은 굳이 ‘마른 땅’이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는 사건'과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입성하는 사건’에 ‘마른 땅’이라는 어휘를 사용한 것이다. ‘마른땅’은 바다가 완전히 물러갔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물이 물러가고 땅이 드러나는 사건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애굽 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홍해에 빠져 죽는 것이고 가나안 쪽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마른땅에서 올라오는 것, 바로 그것이 구원이다. 그러니 셋째 날의 바다가 물러가고 뭍이 드러남은 온전한 하나님의 그 나라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것을 합쳐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생명이 존재하는 가장 적합한 환경으로 이 천지를 만드셨고 가장 알맞은 비율로 나누어 놓으셨다. 영적으로도 합쳐져서는 안 될 것들은 분리시켜 놓으셨다. 사라질 것과 영원한 것을 나누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목적을 이루고자 남겨둔 것들을 조만간 역사의 시간에서 지워가신다. 혹 하나님이 나눈 것들이 합쳐진 때가 있었다. 첫날 나누신 어두움과 빛이 다시 합쳐져서 흑암이 된 경우가 출애굽 직전 애굽에 내린 재앙 중 하나였었다. 빛과 어두움이 섞여 빛이 사라지면 생명체도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둘째 날 나눈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다시 합쳐지고 셋째 날 나눈 물과 육지가 섞인 사건이 노아의 홍수였었다. 그 사건으로 숨 쉬는 일체의 것들이 모두 죽었다. 하나님이 나누어 놓은 것이 합쳐지거나 뒤섞여 혼합이 되면 그것은 저주가 되는 것이다.
결론.
이런 사건은 우리 삶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 신자와 세상을 나누어 놓았고 교회를 세상과 분리시켰다. 이는 악한 세상을 물러가게 하시고 하늘 시민만 남기시겠다는 의지였다. 영적으로도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니 신자는 세상과 섞임에 조심해야 한다. 혹, 하나님의 창조적 분리가 우리의 우매함과 나태로 다시 뒤섞임은 그것이 바로 재앙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세상에 섞여왔다. 그러니 이미 새 창조가 되었음에도 우리 속에 여전히 죄의 속성과 오염과 부패가 남아 있다. 다행히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그 더러운 어두움과 바다를 몰아내실 것이니 속물로 살지 않도록, 하늘 원리로 살기를 힘쓰자. 그 과정이 신앙생활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18~20)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만하게 채우는 삶 (0) | 2022.01.24 |
---|---|
엘 샤다이 (0) | 2022.01.23 |
희망의 지도 (0) | 2022.01.23 |
찾아오신 하나님 (0) | 2022.01.23 |
지상에서 영원으로 (0)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