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3. 23:1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 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니라."(창17:1-8)
임인년 새해에 다짐해 본다. 더 친절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로 사람들을 격려하며 살겠다고 말이다. 다짐하는 나는 약하나 하나님이 가능케 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 약한 나로 강하게 하는 그분은 전능자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라는 이 명칭은 사실 사람들에게 직접 계시한 최초의 하나님 이름이었다.
1. 느닷없이 나타나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사고 제단을 쌓은 후, 그가 부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엘로헤 이스라엘'(창33:20)이었다. 이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으로서 선택한 자를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 벧엘에서 단을 세우고 거기서는 하나님을 '엘 벧엘'이라 불렀다. 이는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라의 박해를 피해 도망하던 하갈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지키심을 체험하고 그 때 부른 이름이 '엘 로이'(창16:13)였으니 이는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은 그 뜻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
99세의 늙은 아브람에게 갑자기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 즉, '엘 샤다이'라 하시며 당신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명하셨다. '갑자기' 또는 '느닷없이' 나타났다 말함에는 이유가 있다. 이 이야기 앞은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그의 나이 86세였더라'는 말로 끝난다. 이후 아브람이 99세가 되기까지 13년 동안 아브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성경은 한 줄의 언급도 없다.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왔을 때 그의 나이 75세, 이후 11년이 지나 86세에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13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그의 나이 99세에 이르렀다. 16장과 17장 사이에 13년의 세월이 있었던 셈이다. 그때,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난 하나님이 당신 이름을 '엘 샤다이'라 하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다. 대체 이 13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나?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이 부르심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낯선 땅에 이방인으로 들어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거기서 열심히 살며 부를 일구어 큰 부자가 되었다. 나중에는 군대까지 거느린 세력이 되었으니 아브람은 모든 걸 갖춘 성공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다. 가나안에서 이룬 그 모든 것을 물려줄 상속자가 그에게 없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밤하늘을 보이시며 위로하고 다시 약속해 주셨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아브람이 이 약속의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도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창15:6)
2. 신실한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지만 아브람은 기다리지 못했다.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자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10년 후에 아내의 여종 하갈에게서 다음 해에 아들을 얻었다. 그리고 그 아들 이름을 '하나님이 들르셨다'는 뜻의 '이스마엘'이라 하였다. 86세가 되도록 단 한 명의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상속자가 없는 상황에서 얻은 아들이었으니 그 기쁨이야 말할 수가 없었다.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그의 삶은 비로소 완전하게 된 것 같았다. 성경은 이후 13년 동안 그의 삶에 대해 한 마디도 없다. 이는 그의 삶에 특별히 언급할만한 의미 있는 일이 없었다는 말이니 그저 평범하게 지냈다는 의미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브람은 만족스럽게 살고 있었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로망 하는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물 흐르듯, 문제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삶, 우리는 그런 삶을 '하나님의 은혜'라 말해왔다. 아마 아브람도 그 13년의 세월을 그간 고생하며 살아온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 여겼으리라. 그래서 날마다 자라는 아들 이스마엘을 보며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지낸 듯하다.
그런데 13년 만에, 이제는 다 늙어 99세가 된 아브람 앞에 나타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다. 완전하라? 이미 모든 것이 만족하니 그 정도이면 완전한 삶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쑥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완전하라 하셨다. 이는 실상 질책의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처음 부르실 때 그가 복이 될 것이니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지난 13년 동안 그는 이스마엘을 얻고 그 기쁨에 취해 하나님의 본래 약속을 잊은 채 자기 가족 안에 묻혀 노년의 평온함을 살아왔었다. 이에 그 평온한 일상을 깨고 나타나신 '엘 샤다이' 하나님은 다시 '언약'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하며 이름까지 아브라함으로 개명하였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4~5).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이니 한 가족, 종족의 아버지에서 종족과 민족을 넘어 많은 무리의 아버지, 곧 열국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었다. 엘 샤다이 , 곧 전능한 하나님은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이다. 능히 이루시기에 엘 샷다이이다. 아브람과 사래는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능히 성취되고도 남음을 아브라함은 믿어야 했다. 그 하나님이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 하심은 인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지고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더라도 그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을 붙잡고 끝까지 '언약의 삶'을 살라는 말이다. 이 언약적 삶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다. 우리를 선택하여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고자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당신 자녀가 되게 하려는 복이란 말이다.
3. 어려울수록 더욱
새해 초두에 사람들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들을 한다. 그런데 사실 무슨 복을 받으라는 것인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4:18).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말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9~22). 약속한 그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브람이 만남 전능한 하나님, 즉 '엘 샤다이'였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모든 희망에 반대되는 희망'이었고 '길 없는 곳을 걸어간 믿음'이었다. 아브라함 앞에는 길이 없었다. 다만,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걸어간 그 길이 오늘의 우리가 걷는 믿음의 길이 되었다. 믿음이란 그런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에,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으며 알 수 없는 미래로 가고 있지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이다. 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의 선함이 아닌 당신의 약속에 기초하여 일어남을 확신하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차가운 세상, 어둡고 삭막한 세상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꿋꿋함과 의연함으로 살 수 있다. 세상이 변덕스럽고 논리적이지도 못한 채 자기들 중심적임에도 그런 세상, 그런 사람들 속에서, 이해와 친절과 정직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오늘 행한 나의 선을 내일의 사람들이 잊어버릴지라도 여전히 내 가진 최상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넉넉함, 그것이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의 복이다.
'엘 샷다이'라는 전능한 하나님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런데 왜 이 이름이 유독 욥기에 많이 나올까? 구약에 모두 48번 등장하는 '엘 샤다이'라는 이 이름이 욥기에서만 31회가 나왔다. 잘 알려진대로 욥기는 고난에 관한 책이다. 고난, 바로 그 고난 속에 '엘 샷다이'라는 전능한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올 한 해도 고난의 여정은 여전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작년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난의 시간을 살 때가 '엘 샷다이' 전능한 하나님, 약속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이다. 아브람 앞에 불쑥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언약의 상속자임을 상기시키면서 저만치 다가 온 약속의 땅을 향해 가자고, 다시 한번 힘을 내라고 위로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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