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9. 20:51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뭔가를 해야만 한다!> 일종의 강박적 집착이다. 더하여 불안이나 우울증 반응까지 동반된다. 불안과 격한 경쟁을 살다보니 이런저런 증후군들이 오늘 우리들 사고에게 베어 있다. 몸은 공원에 나가 있으나 마음은 여전히 일에 눌려 더 불안해지는 <휴일 증후군>, 맛난 음식이 지천에 널렸어도 날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그림의 떡으로 치부하는 <다이어트 증후군>, 컴 실력은 문서 작성이 고작임에도 새 성능 컴퓨터가 나오면 그 모델로 즉각 바꾸어야만 마음이 편한 <속도 증후군> 등.
삶은 자유롭고 풍요로워야
불안의 시대이고 쫓기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속도와 성공의 우상 문명에 갇혀 버렸다. '원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를 잊어버린채 말이다. '원함'은 사회적인 것이고 '좋아함'은 개인적인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남이 원하는 걸 따라 하게끔 부추겨 무한 소비를 조장해 왔다. 멋진 모델이 명품 가방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면 그 모델이 소유한 가방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인정받고 싶고 그렇게 비교우위에 서 있도록 몰려간다. 그런 식으로 살면 언제까지 그 행복이 유지될까?
비교는 우리 행복을 취약하게 만들 뿐이다. 반에서 1등을 하면 비교우위에 서 있지만 전교 1등이 그 반에 오면 그 날로 2등으로 밀려난다. 전교 1등을 해도 전국 1등 앞에 가면 그저 왜소해질 수 밖에 없다. '나의 만족'이 아니라 '남의 장단'에 목 매여 사는 한 이 순환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사회적 원함'이 아니라 '나의 좋아함'이 행복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필요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다수 사람들의 원함을 모방하며 살아간다면 그 피곤함을 어찌 감당하려는가?
오죽하면, 하나님이 천국시민의 준수사항으로 멈춤을 명하셨으랴! 어떤 경우에도 여섯째날, 즉 일곱쩨 날에는 멈추고 쉬라 하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실현을 위한 경쟁에 멈춤을 모르고 그저 달리기만 하니 그 삶이, 우리 공동체가 각박해하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작금의 코로나 사태는 한가지 분명한 것을 깨닫게 한다. 무한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말이다. 끝없는 경젱으로 환경이 파괴되니 더 지독하고 극악한 질병이 우리 공동체를 흔들고 있다.
욕심과 경쟁은 만악의 뿌리
이미 오래전부터 성경은 인간의 무한 욕심과 경쟁심이 만악의 뿌리라 경고해 왔다. 그 무한한 욕망에 기초한 성공의 허무함을 말하는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1:2-3) 라는 의문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하는 그의 글에서 전도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도 소개하였다. 그는 사업을 크게 하였었고 자신을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모든 자들보다도 더 많은 소와 양 떼를 소유를 소유하였었노라고.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들이 그를 위하여 쌓였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까지 많이 두었었노라고. 그는 자신이 이같이 창성하여 그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였었다고 스스로의 업적을 소개하였다.(전2:4-9) 실로 그는 큰 부자였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대성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부러워 할 그 성공의 정점에서 그는 한 깨달음에 직면하여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2:11).
전도자 자신만이 아니라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인간의 수고가 모두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단다. 단지 허무주의를 말함이 아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셨다'라고 연민까지 보였던 그였다. 그럼에도 해 아래에서 하는 인생의 모든 수고가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헛되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유는 '사람들이 그 분을 경외하게 하려 하심을 알았도다'고 고백하였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단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말한다. 인생의 행복과 만족은 창조주를 기억하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에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12:1-2).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위하여
누구나 만족을 찾고자 한다. 모두가 행복을 추구코자 한다. 무엇이 진정한 만족이고 어떤 상태가 진정한 행복인가? 성서는 분명하게 답한다. 하나님이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말이다. 하니님을 알기 전에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르고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본질상 진노의 속물들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버리고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3:5).
이런 '새 사람'의 원형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더 높아지고 더 가지려 싸우지만 예수는 자신을 비우고 낮추고 섬기셨다. 그 비움과 낮춤과 섬김에 생명의 길이 있다. 동양화에 여백의 미가 없다면 동양화적 존재가치를 잃듯이, 음악이 음표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사이에 있는 숨표로 완성 되듯이.
사람들의 욕심이란 안으로 채우기만 하는 삶이기에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짐 없는 인생이 어딘들 있으랴? 모든 인생들이 다 나름의 자기 짐을 지고 산다. 그런데 주님이 내 짝이 되어 함께 짐을 져주신다면 내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겠는가.
결론
요즘은 지루하고 지겨운 날들의 연속이다. 하여 우울하고 심란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이 곤고한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한 깨달음을 준다. 진정한 쉼이 멈춤에 있음을. 그리고 멈추어야 모두가 쉴 수 있음을. 공장이 멈추고서야 하늘이 깨끗해졌고 이런저런 오염이 줄면서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 탐욕과 안식은 병행이 어렵다. 탐욕을 멈추어야 쉼이 가능하다. 내려놓고 비움으로서 하나님의 소명을 완성하신 주를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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