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9. 20:4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전염병 재앙에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다. 생계 기반까지 무너지고 있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최선을 다해 왔는데, 우리 삶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다>라는 말이 실감되는 시국이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까지 걸어왔으면서 마지막 깃털같이 가벼운 짐 하나의 무게로 쓰러질 수 있다니?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를 참지 못함은 그간 있는 힘을 다 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깃털같이 가벼운 그 짐이 지금까지 견뎌온 무게보다 수천 배 더 무거울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태어난 우리 인생을 어쩌겠는가? 다시 최선을 다 하고 사력을 다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럴 때가 있다. 신이 우리 삶에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 돌을 걷어차다 다치는 인생이 있고 그 돌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는 인생도 있다. 그래서 새들이 바람 심한 날 집 짓는 이유가 강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집을 얻기 위함이라는 말에 공감이 가는 것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이 지독한 현실에서
하늘 제왕이라는 독수리의 수명은 인간과 비슷하다. 그런데 30살이 넘으면 부리가 자라서 목을 찌르고 날개 깃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한다. 발톱마저 날카롭게 살 속을 파고들어 죽을 위기에 직면한다. 이때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죽을지, 거듭날지를 선택해야 한다. 살기를 선택한다면 이때부터 6개월 정도 먹는 것까지 포기하는 고된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 높은 산정에 둥지를 틀고 암벽에 수 없이 부리를 쳐 깨뜨리고 다시 새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새 부리가 나면 그 부리로 옛 발톱을 모두 뽑아내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또 기다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새 부리로 낡은 깃털도 다 뽑아낸 후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다시 기다려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독수리 몸은 피범벅이 된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친 독수리에게는 새 웅비가 기약되어 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7~31)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무한한 바다에 대한 앙망을 갖게 하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여호와를 '앙망'해야 다시 산다. ‘앙망’이란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해서 그것만을 생각함'이다. 저 무한한 바다를 앙망하게 하면 스스로 배를 만들기 마련이다. 신을 향한 삶이란 현실에서 독수리의 웅비를 준비하는 삶이다. 모두들 보이는 성공을 좇아 사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 윤리를 지향함이 하늘 시민의 삶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여호와를 앙망함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봄이다. 그렇게 여호와를 앙망하고 동경하는 인생이어야 이 지독한 현실을, 저 거친 바다를 안전하게 해쳐나갈 배를 만들 수 있다.
이상이냐? 현실이냐?
항상 이상주의는 현재보다 미래를 중히 여겨왔다. 그러기에 장래 소망을 위해 지금 고통을 견디라 한다. 그런 이상주의에 반하여, 현실주의는 현재 일을 중히 여기기에 나중을 위해 지금 희생에 반대해 왔다. <생일날 잘 먹자고 이레씩 굶을 수는 없다>고 주창해 왔다. 인간 욕망을 절제와 자족적 미덕으로 삼아 온 이상주의나 그 욕망을 충족시켜 더 큰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려는 현실주의나 다 그 나름의 일리는 있다.
하지만 인간 역사에서 의미 있는 진보는 땅만 보고 살았던 때가 아니라 하늘을 보며 살았던 시대였다. 어려워도 넓은 바다와 높은 하늘을 바라보았던 시대, 그런 시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았었고 인문에 대한 평가들도 품위가 있었다. 그 이상이 높을수록 그로 인한 발전의 크기도 높았다. 하여 성서 곳곳에는 "너희 눈을 들라" 말한다. 땅의 것만 생각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이다. 눈을 들어 산을 보면 도움이 그 산에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곳, 즉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시인들의 고백은 신의 형상인 인간이 저 높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함을 진짜 사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이다"(시 1211-2)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보인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예수처럼, 바울도 같은 맥락으로 말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에 있는 것,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라는 말이었다. 추구는 목적을 이룰 때까지 쫓아가며 구함이다. 신앙한다 함은 단지 약속에 대한 이상을 가졌다는 말 그 이상이다. 그것을 추구해 나갈 신념과 삶이 따른다는 말이다. 그러니 행동 없는 신앙은 위선이요 이미 죽은 믿음이라 하잖았던가.
인생은 선한 싸움의 여정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도다'(딤4:7). 바울이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선한 싸움'으로의 여정이다. 그 과정에서 영생을 경험함이 믿음의 삶이다. 영생, 그것은 이 땅의 삶에서 경험하는 신적인 시간과 삶이다. 이 여정에 참여한 인생들은 이미 도래한 신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믿음은 단순히 바라고 소망함이 아니다. 그 바라는 것을 위해, 그 믿는 것을 향해 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매일 꾸준하게 이루어 나가는 삶이다.
수도원과 감옥, 그 안에 사는 수도사나 죄수의 삶은 외형상 별 차이가 없다. 둘 다 엄격한 규율과 제한 속에 갇혀 산다. 다만 감옥은 타의에 의한 절망의 시간이고 수도원은 자의에 의한 소망의 시간이다. 죄수들에게 출옥은 지금에서 미리 맛볼 수 있는 현실이 아니지만 수도사들에게 경건과 노동은 그들이 품은 높은 이상의 지금이다. 오늘 여기서 맛보는 기쁨이요 천국의 시간들인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에서 영적인 시간, 즉 영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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