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새로움

2020. 12. 19. 20:5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지난한 재앙 시간들이 계속되고 있다. 언제쯤 끝이 날까? 세계적으로는 더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정말 지긋지긋하다. 삶의 질이 엉망이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이랴? 우리의 무지과 만용의 결과인 것을...!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 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의 주인이자 생태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에는 이들은 신이 되려 한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태세를 갖추고 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그렇게 신적인 존재인 줄 알았던 우리 인간들이 초미세 바이러스에 무너지고 있다. 슈퍼 렌즈로만 볼 수 있는 미세 바이러스 습격에 속수무책이다. 자연에게, 동물에게 그렇게 욕망을 드러내고 수탈을 일삼은 결과이다. 야생동물들이 사냥되어 시장에서 거래되고 수십억 마리의 가축들이 공장식 농장에서 사육되는 오늘의 환경 구조가 동물 바이러스의 인간 침투 통로를 제공한 것이다. 

 

무지와 학대를 넘어서

 

인간은 신의 형상이기에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함이 마땅하다(창1:28)고 유대인들은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기를 '인간이 이성적 사고 능력이 있기에 동물을 지배함은 당연하다'고 했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자면 참으로 무지하고 만용스러운 사고가 아닐 수 없지만 그런 사고는 기독교에도 스며들었다. 모두가 다 성서 메세지의 곡해에서 비릇된 시선들이었다. 성서 정신으로 볼 때, 그런 무지와 학대는 죄악이고 신성모독이다. 신은 모든 생명을 지으시고 복주셨다. 그러니 자연과 동물에 대한 학대나 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침해인 것이다. 인간에게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같은 복을 주셨다. 인간을 지으시기 전날에 물속 생물들과 공중 새들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창 1:20-23). 

 

신이 동물을 인간의 먹을거리로 창조하셨다는 곡해는 오래된 전통이었다. 성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신의 명령이 동물을 맘대로 죽이고 함부로 수 있는 권리를 주신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 1:29) 하신 말씀이 있다. 이는 '채식 명령'이었다.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같았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창1:30).

 

인간들의 악으로 세상이 탁해진 이레, 신은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에 잠겨 있는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다시 창조한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사상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유명한 이사야의 비전 구절인데 그 뒷 구절은 더욱 놀랍다. '이리 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사65:25).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 세상! 이는 태초의 채식으로의 회기 명령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는 세상이다.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

 

인간들은 자신들 외의 생명체를 지나치게 대상화하여 왔다. 하지만 성서는 동물이 인간과 동등하며 때론 인간보다 특별한 존재라고 말하기도 한다. 혼을 가진 동물도 신의 뜻을 읽는 영안이 있음을 증거 하는 발람 이야기(민22장)가 있지 않은가! 출애굽 백성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의 일이었다. 모압 왕이 이스라엘이 무서워 선지자 발람에게 자기를 위하여 저들을 저주해 달라고 초청하였다. 거듭되는 요청에 발람이 왕을 만나러 길을 떠날 때 신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발람은 그를 보지 못하나 그의 나귀가 이를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발람은 길을 벗어난 나귀를 채찍질하고 지팡이로 때렸다.

 

그때 신이 나귀 입을 여시니 나귀가 주인에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이렇게 때리는가?' 그때 신께서 선지자의 눈을 밝히니 비로소 신의 사자가 칼을 빼 들고 자기 앞길을 막아서 있음을 보았다. 보이는 신의 사자 말했다.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을 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자기의 불행한 처지를 비웃는 친구들을 동물들에 빗댄 욥의 항변 이야기도 있다. '이제 모든 동물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욥12:7-9). 이런 동물들이 오늘날 우리 인간의 무지와 학대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거기서 오늘의 우리 인간들이 겪는 여러 재앙과 고통들이 나왔다.

 

탄식과 고통에서 해방으로

 

바울은 말했다.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신의 자녀가 누릴 영광의 자유를 바라보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8:18-22)고 전망하였다.

 

아담의 죄로 인해, 또 그 후손인 아담들의 악들로 인해 잘못이 없는 땅과 여타의 피조물들까지 저주를 받았다(창3:17). 그러니 죄의 지배가 끝나고 신의 영광이 임하는 날,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에는 만물도 구웜받는 날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신의 창조 세계 전체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신의 그 구원을 갈망한다고 바울은 탄신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런 종말은 우주적인 파국과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온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좀 덜 먹으면 어떤가? 좀 천천히 가면 어떤가? 또 좀 불편하게 살면 어떤가? 신은 그 메시야를 통해, 그리고 그렇게 믿는 믿음을 통해 만물을 새로 창조하시고 모든 존재를 새롭게 하신다. 처음 창조 때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그때처럼 오늘날에도 이끄신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어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15:5) 이 회귀가 가능하다. 

 

결론

코로나 19, 이 고통의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달라질까? 피조물 착취가 극에 달한 작금의 상황이 달라질까? 인간은 '하찮은 것에게도 흔들리는 약한 존재'였다. 그 인간들의 그 악 때문에 동물과 산천초목 모두가 '썩어짐의 종노릇'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 상태로부터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만물의 새로움에 이르기를 희망하며 '이제도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 그 해방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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