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인과 메시아

2020. 12. 25. 15:1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예배시 '사도신경'을  합동으로 고백한다.  그 사도신경 내용 중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구절이 있다. 예수 출생이 초자연적 사건이냐? 아님 자연 인간 예수를 영웅으로 띄우려는 극화적 문학 표현인가? 그 해석과 관련된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오늘날까지도 여전하다..

 

예수 탄생에 대한 기록은 성서가 유일하다. 그러므로 성서에 근거한 논의가 가장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하다. 그런데 그 탄생 이야기는 네 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소개되고 있다. 그나마도 예수 탄생 전후 묘사에서 두 복음서의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마태는 요셉이 꿈을 꾸고 천사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고 정혼자 마리아는 그냥 침묵 속에 예수를 잉태하였다고만 전한다. 반면, 누가는 마리아가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천사와 만났고 하나님의 계시까지 받은 것으로 전한다. 오히려 요셉은 마리아의 약혼자로만 언급될 뿐 침묵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두 여인

 

누가는 예수 탄생을 두 여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였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 여인들의 임신은 이해가 어려웠다. 한 명은 임신이 불가능한 늙은 나이였고 다른 한 명은 임신하기에 너무 어린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임신 사실을 알고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 있었다(눅1:24). 마리아 역시 크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우 12~13살 소녀, 오늘날로 치면 중1 나이였고 게다가 아직 정혼한 상태에서 아기를 잉태했으니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는가? 그녀의 당혹감과 두려움은 천사가 찾아와 고지해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1:35~37)

 

천사가 친척인 엘리사벳도 늙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신했음을 알려주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다는 위로마리아는 지금 무언가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그 길로 마리아는 친척 언니 엘리사벳이 있는 마을로 달려갔다. 거기서 두 여인은 석당을 함께 지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변해가는 자신들의 몸에 대해 이야기하며 노산과 초산에 대한 두려움을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두 여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자신들의 역할을 더 선명하게 느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언가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여인들이 변하다

 

이 기간을 보내면서 늙은 임신으로 숨어있던 여인은 당당해졌다. 그래서 그녀의 입에서 마리아를 향한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축복의 말이 터져 나오기까지 하였다그 축복의 말에 어린 여인 마리아의 마음을 누르고 있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 입에서도 놀라운 찬가가 터져 나왔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소위 저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였다. 어린 여인 마리아는 하나님이 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심 깨달았다. 하여 자신에게 일어나는 지금의 일들은 그녀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약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임을 또한 느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는 모든 찬송 시의 극치에 이르는 놀라운 찬양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찬양이 있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을 잉태했을 때 부른 '한나의 노래'가 그것이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니 여호와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2:1,8).

 

구약의 한나와 신약의 마리아가 만난 하나님은 약한 사람을 위로하시며 그들을 통해 큰 일을 하신다. 제 잘난 맛에 하나님의 필요를 못 느끼는 교만한 사람보다 한계를 느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오늘날, 거룩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이름 '마리아'그들 사회에서 '미리암'으로 불리는 흔한 이름들이었다. 당시의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이 이름은 그녀가 비천한 계급의 여성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흔한 보통 여인의 몸에서 메시아를 출현토록 하셨다. 그래서 바울도 말하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세상 이치는 올라가는 것이 영광이고 낮아지는 것은 수치이다. 그 이치는 예수 당시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 그는 한 인간이면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 결국 신이 되었다.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오를 수 있는 정점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를 '옥타비아누스'라는 인명을 버리고 '신적 존귀한 자'라는 뜻'어거스틴'이란 신명까지 자칭하였다. 그러나 성탄은 이런 세상 이치를 거슬린 사건이었다.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이 되는 사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 높으신 분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사건, 가장 거룩한 분이 황실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마구간에서 나신 사건, 그것이 성탄이었다. 하나님이 인간 몸을 입고 우리 사람들의 아픔에 참여하셨고 처참히 죽으셨다. 이 사건이 사람들 보기에 치욕이겠으나 성서는 이것이야말로 '영광'이라 한다. 진실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기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이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사9:6~8)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사건, 자기 전부를 건 하나님의 모험, 그것이 성탄이었다. 힘들고 외로운 이들을 찾아오신 그 하나님은 강한 군대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오시되 우리들의 날 것 한 가운데로 오셨고 척박한 삶의 현장으로 오셨다. 그 아기는 '기묘자'였고 '전능자'였으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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