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9. 20:4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삐 살다 보니 세상 보는 눈이 좁아졌다. 앞만 보며 살다 보니 사람됨이 옹색해졌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분개하였고 사소한 사안에도 이시비를 가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소인배가 되어 버렸다. 결국 오늘의 많은 군상들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신의 형상, 지존자의 모양을 입은 우리들이었거늘 오늘의 모습과 군상은 신의 본성과 멀어도 너무 멀어졌다.
달리는 인생들
길을 걷다가 무언가를 기억이 잘 나지 않으면 걸음을 늦춘다. 생각해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느림과 기억은 하나이다. 반면, 길을 걷다가 어떤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다면 걸음이 빨라진다.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함이다. 그러니 빠름과 망각 역시 하나이다. 빠르면 잊게 되고 생각할 수 없으니 빠름은 망각이다. '느림과 기억' 그리고 '빠름과 망각'의 관계를 설명한 어느 사회학자가 한 이야기는 그래서 공감이 간다.
속도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은 그 역사가 깊다. 그 결과, 현실과 상상의 가교를 찾아내어 기술과 과학의 큰 성과를 이루었다. 오늘에는 인생, 문명, 역사의 속도를 넘어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라도 할 기세이다. 하지만 좀 더 멀리서 보면 인간 속도는 상대적일 뿐이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의 스피드는 보잘것 없고 어찌보면 부질없다고 할 정도로 미미하다.
지구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라. 7분 사이 우주공간 12800km를 질주한다. 이미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구체에 승차해 있다. 그 지구가 시속 10만 km 속도로 매년 9억 km의 태양 주위를 돈다. 6개월 후면, 우리는 그 먼 거리를 지금 보이는 태양의 정 반대편 지점에 가 있을 것이다. 정말 빠른 속도이다. 하지만 우주의 시공간에서 본다면, 한 작은 지점을 이리저리 맴돌고 있을 뿐이다.
유한과 영원
풀은 아침에 피어 자라다가 저녁이면 시들어 마른다. 인간 일생이 순식간에 끝남을 그렇게 표현해 왔었다. 이런 유한한 존재가 우리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이었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선지자들은 간청해 왔었다. 시인들도 참회하며 노래해 왔었다. 인간이 작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다면 하늘을 올려다 보라 그것도 밤의 하늘을 보라. 그렇다. 종교적 감성, 그 경외감을 경험해 보는 최상 방법은 밤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 밤의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의 유한성, 이미 오래전부터 성서는 일관되게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해 왔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니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음을 깨닫습니다.“(시90편 중)
세상이란 지구 상의 나라들이고 역사란 인간들만의 시간과 사건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만을 중심으로 생각한 착각이었다. 세상, 즉 세계는 1,000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하는 광활한 우주 전체였고 역사 또한 약 140억 년의 우주 역사였다. 그러니 인간 중신의 우주와 역사 개념은 정정되어야 한다.
이렇듯 세계와 역사에 대한 스케일이 달라지면 그 속의 인간도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인간은 이 전체에서 변방에 있는, 그것도 아주 작은 별에 살고 있는 한 점의 존재에 불과하다. 그리고 한평생이라는 인간의 생도 우주 역사 관점에서 볼 때 찰나의 순간일 뿐이다. 우주 스케일에서 보면 점과 같은 존재, 한 순간의 찰나적 존재가 인간이고 세상사인 것이다.
그 경계에서
욥은 신심이 두터운 사람이었지만 지독한 재난과 재앙을 겪었다. 친구들의 위로조차 소음으로 들릴 정도로 치명적인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신심 깊게 살아 온 그였기에 그 고뇌는 매우 깊었다. 현실과 영원의 경계에서 생겨난 그의 회의는 신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자기 처세와 상관없이 닥쳐 온 그 어려움에 대하여 신을 탓하며 따져 물었다, 그 와중에 폭풍 속에서 우레 같은 신의 음성을 들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으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38:2~7)
욥의 고통은 지독했고 치명적이었지만 이 거대한 우주 앞에서 별것이 아니었다. 그가 주장할만한 억울함, 납득될만한 사연들이 다 부질없었다. 유한이 무한에게 삼켜지고 시간이 영원 앞에서 제 한계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영원과 시간, 그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영원은 초시간이고 신의 영역이었다. 그러기에 모든 시간이 거기서 기원한다. 그것은 무한하고 숭고하기에 고난 한가운데 있었던 욥조차도 제대로 항변치 못하였다. 오히려 그 숭고함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엡1:9).
그렇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세상사 모든 일들에는 다 하늘의 때가 있다. 사람들이 소망하고 각 인생들이 도모한들 신께서 그 정하신 기한에 당신의 떼에 따라 이루신다. 그래서 예수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 첫 말씀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였다. 그리고 죽음이 닥쳐오자 역시 '때가 왔다'(마26:45)고 하셨다.
톨스토이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 일부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발로 밟는 모든 땅을 주겠다는 제안에 그 농부는 눈앞의 땅을 한 치라도 더 갖고자 종일 뛰고 또 뛰었다. 그리고 돌아오다가 죽었다. 결국 그에게 필요한 땅은 고작 그가 묻힐 2m 남짓의 땅이었다. 사람들이 더 소유하고 더 누리려고 숨이 찰 정도로 달린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삶은 더 피폐해졌다.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은 망가졌고 신의 형상이었던 인생들은 천박해졌다. 사랑을 말하고 영원을 사모해야 할 우리 인생들이 망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서두르지 말자. 서두름은 신의 시간, 그 경륜 안에 살지 않음이다. 이미 너무 멀리 왔지만 그나마 돌이킬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여인과 메시아 (0) | 2020.12.25 |
---|---|
친밀함의 행복 (0) | 2020.12.19 |
삶의 안식을 위하여 (0) | 2020.12.19 |
만물의 새로움 (0) | 2020.12.19 |
다시 새 힘을 (0) | 2020.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