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의 행복

2020. 12. 19. 20:5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인간들은 왜 신을 피할까? 언제부터 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숨었을까? 에덴동산 사건 이레, 인간은 신을 무서워 하였다. 그 신으로부터 도피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선악과 사건으로 자신을 찾는 신에게 인간은 말하였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하란으로 도망가던 야곱도 돌 베개 베고 자던 그 밤에 신의 음성을 듣자 그 자리에서 무서워 독백하였다. '두렵다!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구나'(창28:17).

 

정말 숨을 곳은 있던가  

 

범죄 이후 인간과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깨졌다. 그 신이 두려워 도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악이 우리와 우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기 때문이요 우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려서 우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하였기 때문이라'(사59:2). 그런 인간을 찾아 오신 예수도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탄하시며 말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라"(요3:19-20). 

 

인간이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존재였기에 그 검은 행위가 드러날까봐 신을 피해 어둠으로 도피하였다. 자기 은밀함것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심지어 그 신에게도 감추어지기를 원했다. 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의 성향이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이 시대에 신의 현존과 임재를 피해 달아날 가장 효과적인 피신처는 '일'이다. 일 중독의 오늘 사회에서 더욱 그렇다. 분주함에 파묻혀 애써 자신을 잊고 또 신의 시선을 외면하는 이 세태는 '풍요로운 삶'으로도 도피하기도 하고 절망으로 숨기도 한다. 욥의 경우를 보라. 그는 너무도 힘들어 지옥이 자기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그 침상을 흑암에 펴놓고자 시도하였었다.(욥17:13) 얼마나 힘들었으면 절망으로 도피코자 했겠는가? 그러나 정녕 신으로부터 도피할 곳이 없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또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다"(8절).

 

스올은 죽은 자들의 거처이다. 삶의 버겨움을 내려 놓으려는 사람들이 도피하고자 하는 유혹의 장소이다. 하지만 어쩌랴? 신이 거기에도 계신 것을! 편재하신 존재는 모든 곳에 계신다. 전지하시기에 모든 걸 아신다. 도망칠 수 없는 신, 피할 수 없는 신, 그러니 그 분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시다. 외면할 수 있고 피할 수 있으며 망각할 수 있는 신이라면 그게 진짜 신일까? 무의식과 망각 세계로 피해 버릴 수 있는 그런 신들은 참 신이 아니다. 그런 신들은 우리 내부가 만들어 낸 모든 바램의 형상에 불과하다. 그런 신들은 우리 상상력과 희망적 생각들이 만들어낸 우상이고 그저 자신들의 위안거리이다. 

 

창조자를 아버지라 부르니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화두를 던졌다. 거룩하신 그분을 사람들은 '절대자'니 '제1원인'니 '전능자' 등 여러가지로 표현해 왔지만 그 분에 대하여 '아버지'라는 이 표현은 생소하였다. 더우기 '우리'라는 말과 어우러지니 친밀감과 인격적 관계감까지 느껴진다. 그것이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 신앙이 신뢰로 이어졌고 그 신뢰가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를 만날만한 때에 나를 찾고 가까이 있는 나를 부르라' 하시지 않았던가!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때 이미 영원은 시작된 것이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설교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2~24)

 

아테네 신들과 달리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찾되 떠나지 않으신다. 이름 모를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이시다. 모세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축복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신31:6)이라 용기를 주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친밀하신 분이시다. 특히 그 친밀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더욱 그렇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친밀함과 허물없이 맞닿아 계심을 느낀다. 하여 가까워지되 그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 도리어 삶의 핍절로부터, 약하여 무너질 것 같은 절망에서, 격한 유혹은 흔들림에서 피난처로 삼는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 하나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 그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부끄럽지만 숨길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왔다. 그럼에도 그 옛날 이사야를 통해 촉구하셨던 하나님은 오늘에도 우리들에게 거듭 촉구하고 계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사로잡힘이고 붙들림이다. 우리는 영원히 '주 앞에' 서 있다. 나를, 우리를 환히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신다. 멀리 있어도 우리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나의, 우리의 모든 행실을 매양 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랴? 탈출구가 없다. 우리의 전 존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내 일생의 운명이 그 분의 섭리 안에 있다. 

 

곳곳에 걸려 있는 현수막. <거리는 2m, 마음의 거리는 0m>. 코로나로 '거리두기'가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때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아담 이레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숨는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모든 우리의 두려움에서 피할만한 안식처이시다. 그 하나님의 친밀하심에서 우리 행복의 근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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