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활의 갈릴리로

2021. 4. 4. 16:0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코로나 19 기승이 식지를 않는다. 이로 인해 정상적인 예배가 중단된 지 1년여, 모이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눈치까지 보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배를 위해서라도 하나님! 제발 코로나 좀 어떻게 빨리 거둬가 주세요!" 많은 사역자들과 신실한 이들이 기도하고 또 기도함에도 다음 예배를 기약할 수가 없다. 부활, 우리에게 갈릴리의 그 부활이 필요하다. 

 

갈릴리는 변방이었고 빈곤한 지역이었다. 그 갈릴리에서 예수는 어린 시절과 공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복음서 대부분 기적은 그 갈릴리에서 일어났다. 그 지역의 분본왕 안티파스는 야심가였다. 그는 황제를 위한 신도시를 만들어 로마의 환심을 사려했다.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이름을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스,' 즉 디베랴로 명명하고 황제에게 헌정하였다. 그리고는 '황제의 도시'에 걸맞게 웅장하고 세련된 로마식 신전과 극장, 행정관청을 세웠다. 여기에 로마인들과 결탁한 유대인의 귀족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급속한 로마화는 도시화를 낳았고 도시화는 상업화를 낳았다. 디베랴가 건설로 갈릴리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공생애는 이런 갈릴리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며 시작되었다. 바닷가를 걸어가실 때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거기서 조금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그들도 예수가 부르시자 주저 없이 배와 자기 아버지를 두고 따라나섰다. 그들이 생업을 포기한 채 즉각 따라나섬은 갈릴리의 급속한 해체 속에서 무언가 새롭고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인과 그리스도인

 

그러나 의욕으로 출발했던 제자들의 바람은 기대한 바와 반대로 흘러갔다. 예수가 처형장으로 가던 날, 이들 중 아무도 감히 골고다 언덕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그 끔찍한 처형 이후 그들은 생각하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죄를 찾을 수 없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일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혼란이 더 깊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가 골고다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 삶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그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자기들을 갈릴리로 부르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놓고 왔던 그 갈릴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마가가 맨 마지막 장에서 빈 무덤에 있던 천사가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자 올라온 여인들을 향해 한 말을 전한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그런데 "여자들이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16:8)고 기록하는 것으로 복음서를 끝냈다. 예수 부활과 갈릴리로 가니 거기서 그를 본다고 전하라 했는데 여인들이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 끝이다.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가의 끝은 황망하다. 후대에 169절 이하 결말을 누군가 창작해 넣어야 할 정도로 참담하다. 왜 마가는 이런 식으로 복음서를 끝맺었을까??

 

찬연한 기독교, 성공적인 힘으로서의 신앙 능력, 이런 모토로부터 이제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기독교는 '비종교적 기독교'이어야 한다. '종교'란 세상을 성과 속으로 분리시키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성의 영역에 바친다. 하지만 성과 속에 대한 이런 이원론적 분리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해 왔다. 분명, 이 세계 안에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영역이나 시간이 따로 없다. 그리스도를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만의 주인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의 주권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약함과 고난의 계시

 

성서는 우리에게 신의 약함과 고난을 말한다.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었다고. 그 하나님은 전능한 해결사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이 세상 안에서 무력하고 약하나 그렇게 함께 하시니 어려워도 정직히 살게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성실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고. 그렇다! 인간들의 종교적 바람은 섬기는 신으로부터 자기 욕망을 이루어주니기에 헌신하고 기도하나 성서의 하나님은 그 약함과 그 고난에서 함께 하시는 분임을 증거한다. 그러니 기독교인은 종교인이 아니다. 크리스천이 비종교인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 기도와 한 세리의 기도에서 종교적인 기도자와 비종교적인 참회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종교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삶에 하나님이 없었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죄인이라고 낙인찍혔던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 안에 있었던 것이다. 예수 당시 발리새 엘리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다. 반면 손가락질받던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었다.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날마다 이 세 가지의 감사기도를 드렸다. 첫째는 자신이 혈통으로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자신이 성별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셋째로 자신이 직업으로는 세리가 아닌 것을 감사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종교적 경건이 아니다. 비싼 제사도 아니다. 정말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미가 선지자로 분명히 말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잃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하나님 없이" 산 사람들이었다. 진짜 경건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약1:27). 경건은 사람을 사랑함이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종교는 형식이 되고 위선이 되며 독선이 된다.

 

갈릴리, 그 바다에서

 

왜 예수는 갈릴리, 그것도 그 바닷가를 사역 현장으로 삼으셨을까? 갈릴리 바다의 크기는 동서로 약 10킬로, 남북으로 약 20킬로, 둘레는 약 50킬로미터에 이른다. 북쪽 헤르몬산 정상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와 바다 안에는 풍성한 생명이 넘쳐난다. 이 바다는 지중해 해수면보다 무려 200미터나 아래 위치하고 있어 아마도 지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일 듯하다. 가장 낮기 때문에 거기로 물이 모여든다. 높은 곳에서 나를 내세우고 주장하며 닫혀 있다면 내 안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도 그의 안으로 흘러들어 갈 수 없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 가장 낮은 곳, 그 갈릴리 바닷가로 오셨다.

 

오늘날 '성인이 된 세계'에서 성의 영역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요즘 사람들에게 종교는 삶의 여러 요소 중 한 가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경건한 크리스천들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본다. 변두리로 밀려난 성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며 산다. 주일 11시부터 12시까지만, 그리고 교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 년 365, 세상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다른 이들을 위한 존재'이었듯이 크리스천들도 '이웃을 위한 존재'가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의 중심에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간다.

 

우리 사회에 교회가 가장 성장했었다는 1970~80년대, 그러나 역사는 그 시기가 극히 비민주적이었고 인권이 무시되었던 시대였다 말한다. 지금도 여기저기서 은혜가 넘친다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강력하다고 간증들 하나 교희의 윤리가 세상 윤리만 못하다고 지적당하고 있다. 갈릴리는 우리 삶의 현장이다. 마가의 황망한 결말은 그의 복음서 첫 장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창1:1절 말씀을 상기시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마가는 복음으로 새 삶과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말한다. 사는 것의 두렵다고, 힘들다고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하였고 지금도 내가 함께 한다. 나중을 염려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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