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과 증거로 산다는 것

2021. 3. 17. 11:42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미얀마 국가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군부의 총과 몽둥이가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가해지기 때문이다. 얼마나 더 죽어 나가고 어디까지 희생되어야 이 나라 시민들이 바라는 밝은 세상, 좋은 사회가 찾아올까? 50년 전, 또는 70년 전, 이 땅에서도 5.18 민주화 투쟁, 4.19 학생 의거를 겪었던 우리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의로운 사회, 민주화된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의인들을 잃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얀마 민주화 투쟁이 유독 우리들에게 예삿일로 보이지 않는다. 

 

마태복음 17장에는 예수의 변화산상 사건이 묘사된다. 일부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갔던 그 산위에서 예수는 얼굴이 빛났고 좌우에는 율법의 대표자 모세와 예언의 대표자 엘리야까지 서 있었다. 이 사건을 기심으로 예수의 사역은 이전 갈릴리 활동과 이후의 예루살렘 활동으로 갈린다. 이 장면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자 할 때 엄청 설레었다. 그들은 그 길을 영광의 여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 세상, 마침내 메시야 시대가 열리는구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정의가 구현되니 드디어 약자와 강자의 처지가 뒤바뀌는 황금시대가 열리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베드로, 그는 좋은 제자였지만

 

성실하고 열정적인 제자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였다. 헬레니즘 문화 전파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 도시였기에 그리스 신전들이 곳곳에 있었던 그 도시, 로마 통치자를 숭배하는 중심 도시 중 하나였던 곳, 하여 도시 이름조차 씨저의 빌립보였던 곳, 그런 곳에서 그는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가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하였다.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이들을 누르고 수탈함이 당연시되는 세상에서 강자를 몰아내고 약한 이들을 돌아보는 예수, 당신이 바로 신의 아들이고 그 일을 위해 기름 부은 자라는 베드로의 고백에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 고백에 예수는 제자들의 기대와 다른 말로 응대하였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 받고 기득권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끝내는 죽는다는 것. 제자들의 기대와 설램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을 바싹 잡아당기며 항의하였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그런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베드로는 좋은 제자였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있었다. 새 세상, 좋은 사회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 자신이 그 희생 제물이 되려 하신다는 사실을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몰랐다.

 

항상 그렇듯 현실은 쉽지 않다. 악의 뿌리가 너무도 깊기 때문이고 그 뿌리들이 서로 내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세상은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조금씩 열려가게 되어 있다. 분명, 하늘나라는 이 땅 역사가 마침내 당도해야 할 오메가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옛 세계가 무너져야 한다. 파괴와 파국이 불가피하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혼란을 동반한다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작금의 전염병 재앙까지도 새 세상을 위한 산고로 해석할 수 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시는 이, 출렁거리는 바다 가운데도 해법을 내시는 이, 사막에 백합화를 피우시는 이, 보이지 않는 그분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라"(11:1) 하지 않았던가!

 

믿음으로 보이는 것들 

 

그렇다. 믿음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면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많다. 사과 한 알 속에도 구름이 흐르고 대지가 숨 쉼을 느낄 수 있다. 그 속에 강이 흐르고 태양이 불타며 땀과 사랑이 스며있음을 볼 수도 있다. 오늘의 사람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산다. 그럼에도 부족한 것처럼, 아직은 아닌 것처럼, 아니 자신만 여전히 불행한 것처럼 느끼며 산다. 원인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의 삶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우리 삶에 끌어들임이다. 저주하고 원망하는 삶이 아니라 위로하며 축복으로 삶이다.

 

더구나 힘들 때일수록 더욱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하다. 민수기 20~22장을 보면, 힘들 때일수록 서로 간의 위로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넌 후에도 출애굽 공동체는 여전히 어려웠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변변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 원주민의 방해까지 받았다. 그들의 훼방으로 길이 막힐 때마다 먼 길을 우회해야 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지도부를 원망했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 이 고약한 곳으로 데리고 왔소? 여기 어디 씨를 뿌릴 만한 곳이 있소? 무화과가 있오? 포도가 있오? 마실 물조차도 없지 않소?"

 

우여곡절을 겪으며 공동체는 요단강 건너편 모압 평지에 진을 쳤다.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또 위기가 찾아왔다. 자기 땅을 침범당한 모압 왕 발락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훼 신이 함께 하는 집단임을 알고 있었기에 모압 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브돌에 있던 소문난 예언자 발람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는 사신들을 보내어 자기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이는 복을 받고 그대가 저주하는 이는 저주를 받음을 내 알고 있소"(22:6). 발람이 갈지 말지를 야훼께 기도하였더니 그 밤에 응답이 있었다. "너는 그 사신들과 가지 말라. 에급에서 나온 그 백성은 복을 받은 백성이니 저주하지도 말라"(22:12).

 

혼란스러울 때는 위를 보라

 

이에 발람이 거절하자 다급했던 발락은 더 고위층 사신들을 보내 후한 보상을 약속하며 재청하였다. 발람은 다시 그 밤에 계시를 기다리니 이번에는 조건부 허락이라는 계시가 임하였다. 그들에게 가되 당신이 하라는 말만 전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발락 왕을 향한 발람의 여정 길에 천사가 칼을 빼들고 막는다. 놀란 나귀가 길에서 벗어나고 벽 쪽으로 붙어 주인 발람의 발을 다치게까지 한다. 채찍으로 때리고 지팡이로 쳐도 말을 듣지 않던 나귀는 아예 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버린. 그때 야훼 신이 발람의 눈을 열자 칼을 빼들고 서 있는 천사가 보였다.

 

이 에피소드는 예지력과 축사 능력으로 왕들의 존경을 받고 또 초청까지 받은 예언자가 실은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나귀만도 못한 존재임을 폭로한다. 예언자 발람도 두려웠다. 하여 동행하라는 신의 지시를 따라 발락에게 갔지만 그의 요청과 달리 모압 광야의 믿음 공동체를 저주하지 않았다. 아니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저주하며 주께서 꾸짖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찌 꾸짖으랴!"(23:8) 오히려 축복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신 야훼의 경험에서 발람은 비로소 제대로 보는 사람이 되었고 제대로 듣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까지 그는 눈이 밝은 사람으로 존경받았었고 역사를 예리하게 해석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계시가 임하자 자신이 극히 제한적인 존재임을 깨달았다. 훗날 바울이 된 사울의 경우도 그랬다. 그가 다메섹으로 예수장이들을 잡으러 가던 그 날, 빛으로 임한 예수를 경험하자 '나는 안다, 나는 옳다' 했던 그의 자부심과 신념들이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던 것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신이 사람들에게 하시는 일이 이러하거늘 여전히 욕심과 이기심이라는 비늘에 덮여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위를 보라. 그래야 널뛰는 세상 삶의 일희일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나보다 더 어려운 이들의 기댈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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