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5. 17:1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요5:1~13)
1. 전설과 미신, 그리고 믿음
38년 세월을 병 낫는 것 하나만을 고대하며 고통 속에 살아온 병자, 그 앞에 말 같지 않은 질문이 던져졌다. ‘낫기를 원하는가?’ 모든 병자들의 소원은 그 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병자를 무시하거나 심경을 모르는 폭력적인 도발이었다. 그럼에도 예수가 병자에게 던진 이 질문에는 '정말 당신이 이 병에서 나을 수 있다고 믿기는 믿는 겁니까?'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병자의 누워 있는 상태에서 이미 그 병이 오래된 것임을 예수는 알았던 것이다. 38년 된 병자 입장에서는 ‘낫고자 하지 않는다면 왜 여기 나와 누워 있겠는가’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이라고 대꾸할만하나 병자는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자기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절규였으나 빗나간 대답이었다.
사실, 예수는 그에게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여기에 대한 병자의 대답이 정답이 되려면 한 가지 전제가 있어야 했다. 정말 연못이 동할 때에 가장 먼저 뛰어들면 치료가 된다는 경우이다. 어쩌면 병자는 자기 병이 낫기를 원한 것이라기보다는 연못이 동할 때에 먼저 뛰어들기를 원해왔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1~2년이 아니리 38년 동안이나 말이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꽉 막히거나 맹신적인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저런 약을 써보기도 했을 것이고 여러 의원을 찾아다니며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을 다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라 어떤 의원도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는 절망, 그 패배의식에 빠진 이후부터였으리라.
그에게는 설령 미신일지라도 오로지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믿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렇게 38년을 지내왔다. 그 세월 동안에 정작 그 연못에 한 번도뛰어들지 못한 채 말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것이 약한 우리 인간들의 실체이다. 사람이 하나의 문제에 심각하게 매이면 가치가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 병자 역시 그랬다. 지금 자기 문제는 연못에 뛰어드는 것인지, 병이 낫는 것인지를 착각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병이 낫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과제는 연못에 뛰어드는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점차 그 길, 즉 연못에 뛰어드는 것만이 자기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믿게 되었다. 그 전설이 사실인지, 그 미신이 현실인지 확인되지 않은 채, 그것이 그에게는 <믿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2. 모순 논리의 순환
설령, 물이 동한다 한들 그는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 수가 없었다. 아니 꼴찌로라도 뛰어들 수 없는 상태였다. 그 병자는 그런 몸을 가지고 그 물이 동하기를 38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 온 전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물이 동할 때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는 비참함으로 살았고 자기 우선이라는 현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면당하고 소외받는 서러움으로 살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연못가를 떠나지 못한, 어찌 보면 이미 한계에 직면한 인생으로 미련을 안고 살아 온 것이다. 그러니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연못가는 참으로 고약한 장소이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그렇게 자기 곁에 묶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경이든 절뚝발이이든 혈기 마른 자이든, 그런 이들에게 불가능한 일을 제시하고는 병이 낫지 못한 모든 책임을 병자에게 돌리는 모순된 논리구조의 장소였다.
연못에 가장 먼저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은 그중 건강한 자이다. 베데스다에 들어감으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해야만 베데스다에 뛰어들 수 있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뛰어들 수 없는 사람임을 망각한 채, 아니 적어도 자기는 멀쩡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들 살아왔던 그들, 실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불가능한 일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시도하며 한숨 쉬는 인생들, 안타까워 하고 회개도 하며 동병상련의 집단도 만들기도 하는 인생들, 집단을 만들었으니 회장을 선출했고 하루 종일 기다리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다 보니 도시락 준비위원장도 선출하며 별짓을 다하다 끝내는 자기들끼리 다투고 싸우며 살아온 우리 인생들이었다.사람 사이에, 집단 사이에, 그리고 경제에서, 정치에서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이러한 오늘의 우리에게 예수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네가 구원받고자 하느냐?’ 많은 이들은 이에 자신 있게 대답한다. ‘믿죠. 성경에 믿으면 나와 내 가족이 구원얻게 된다 하였으니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미 구원도 받았고 천국도 갈 것이고 영생도 얻을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 능력으로 연못에 뛰어들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처럼 오늘날 정말 예수를 믿는 일이 이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게다가 먼저 뛰어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38년 된 병자가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자기 한계를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정말 자기 병에서 나은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다. 오늘의 사람들 믿음이 피상적이고 의례적으로 느껴짐은 왜일까?
3. 전통, 그리고 기득권
이런 38년 된 병자의 삶이 없기 때문이고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이나 개념조차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병을 즐기면서 예수를 거추장스럽고 성가신 존재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것이 병이라면 인간의 숙명이고 운명인 것을 어쩌겠냐며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는 이 병자를 어떻게 고쳐 주셨나? 베데스다 연못물 동할 때 그를 거기 넣어 주지 않았다. 병자의 넋두리 같은 대답을 들으신 후에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은 뒤 그의 넋두리를 듣고는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다. 병자가 그 말을 믿고 일어나 걸어간 것일까? 아니면 그의 믿음이 그를 고친 것일까? 그런데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 율법상, 안식일에는 짐을 들고 움직임은 금지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 병자에게 책망하였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다니?’ 이 날이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38년 된 병자는 해결자 예수를 믿은 것이겠지만 안식일이었기에 그는 안식일도 넘어서는 예수를 믿은 것이 된다. 해결자 예수는 그 병자의 몸을 건강하게 한 것이나 안식일을 깬 예수는 율법에 매인 그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해결자 예수를 환영한다. 안식일을 무시하는 예수는 언제나 자기들의 기존 질서에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일 뿐이었다.
오늘의 교회들도 해결자 예수를 원한다. 이런 이들에게 안식일을 범하는 예수는 사회 질서를 흔들어 피곤한 존재일 뿐이다. 규범을 파괴하고 체제를 위험하게 만드는 불순분자이니 처단의 대상이고 축출의 대상일 뿐이다. 세계 역사는 이런 축출의 역사였고 소위 정통주의자들은 언제나 이런 축출의 힘을 지녔던 기득권자들이었다. 그러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선포는 이런 축출 시도에 대한 카운트 펀치였다. 이런 예수의 명령에이 공명이 일어나는가?그러자면 살아 온 세월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살아온 38년에 대한 환멸과 분함과 원통함이 있어야 한다. 연못에 들지 않고도 나을 수 있었던 그 오랜 세월들, 거기 들고자 몸부림치며 살았던 세월에 대해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 의지는 있었으나 능력이 없는 우리들, 출애굽은 했으나 여전히 광야에서 헤매는 우리들, 그 세월들에 대한 자기 애통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결론
가나안 입성이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가능했음에도 마치 자기들이 잘 정탐하고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얻는 것처럼 생각했던 이스라엘, 묘하게도 그들 열 두 지파 대표들이 가나안을 탐지하는 때로부터 광야생활을 벗어날 때까지의 소모된 기간도 38년이었다.(신2:14) 우리는 정말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일까? 우리의 '믿는다'는 말은 38년 된 병자가 그 몸으로 연못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때는 구원 조건이 '들어가면'이었지만 오늘날엔 그것이 '믿으면'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때의 조건 '들어가면'이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온 그에게는 불가능한 조건이었듯이 오늘의 조건 역시 세속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룰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믿음>은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들지 않고도 낫게 되는 것 이상의 기적이고 은혜이다. <베데스다>는 이름 그대로 '은혜의 집'이었다. 은혜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내 상태나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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